단체
비틀즈
The Beatles
비틀즈(The Beatles)는 1960년 리버풀에서 결성된 영국의 록 밴드이며 문화 아이콘이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되었다.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문화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1960년대 반문화와 대중음악을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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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비틀즈(The Beatles)는 1960년 리버풀에서 결성된 영국의 록 밴드이며 문화 아이콘이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되었다.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문화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1960년대 반문화와 대중음악을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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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비틀즈(The Beatles)는 1960년 리버풀에서 결성된 영국의 록 밴드이며 문화 아이콘이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되었다.
비틀즈(The Beatles)는 1960년 리버풀에서 결성된 영국의 록 밴드이며 문화 아이콘이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되었다.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문화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1960년대 반문화와 대중음악을 예술의 한 형태로서 인식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고 평가받는다. 스키플과 비트, 1950년대 로큰롤을 뿌리로 두며 클래시컬한 음악과 전통 팝의 요소들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사운드에 버무려냈다. 후기 비틀즈는 발라드와 인도 음악에서 사이키델리아와 하드 록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음악 스타일을 탐구하였다. 동양 음악과 철학, 사상을 서양 대중음악에 도입하여 최초로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었고, 대중음악계에서 처음으로 각종 음향기법을 적용하면서 대중음악과 실험음악을 도입, 더 나아가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허물었다. 레코딩, 작곡작사, 표현, 태도, 1960년대 반문화에 있어서의 선구자이자 성혁명, 패션,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치면서, 비틀즈는 음악계를 포함한 문화계와 사회의 다양한 방면을 혁신시켰으며, 모든 것을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1960년대의 아직도 근대적인 색채가 강했던 시대에서 비틀즈가 사회를 새로운 현대 시대로 이끌면서 이러한 변화의 구심점이자 지휘자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 자체로 사회의 전환점을 찍었다고 평가되면서, 당대 젊은이들과 사회문화적 운동의 리더로서 포장된다.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선정됐다.
주된 작곡작사가인 레논과 매카트니를 중심축으로 하는 비틀즈는 레논이 결성했던 그룹 쿼리멘에서부터 출발하였으며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1960년부터 3년에 걸쳐 그 명성을 쌓아갔다. 당시는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베이스 담당이었다. 밴드에서 중핵적 위치를 맡았던 3인조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이 1958년 뭉치게 되었고, 이후 피트 베스트를 포함하여 여러 드러머를 거쳐가다 1962년 스타에게 부탁하여 밴드에 참여시켰다. 매니저가 된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프로페셔널한 음악인으로 탈바꿈시켰으며, 조지 마틴은 그들의 레코딩을 지도해 1962년 말의 첫 히트곡 〈Love Me Do〉 이후 그들의 어마어마한 성공에 이바지하였다. 그 유명세가 커져가면서 덩달아 극심해지는 팬의 광란성을 빗대어 "비틀마니아"라고 명명하게 되었으며, 밴드는 "더 팹 포(the Fab Four)"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엡스타인과 마틴을 비롯하여 밴드를 수행한 여러 인물들을 일러서 비공식적으로 '다섯 번째 비틀'이라고 하기도 한다.
1964년 초 비틀즈는 전세계적인 스타로서 미증유한 수준의 평론적·상업적 성적을 거두었다. 더욱이 영국의 문화적 재기를 리드하는 힘으로까지 발전했으며 미국의 팝 시장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고 1964년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로 은막에 데뷔하였다. 1965년부터 계속하여 비틀즈는 보다 세련된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종래보다 더한층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The Beatles》(일명 '화이트 앨범'), 《Abbey Road》 등을 발표하였다. 앨범 시대의 막을 올림으로써 비틀즈는 싱글을 대신하여 앨범이 보다 음반 소비에 있어 지배적인 형태가 되도록 하기도 하였다. 비틀즈는 아울러 사이키델릭 마약과 동방의 영성에 대한 큰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또 전자음악, 앨범 아트, 뮤직 비디오에 발전을 가져왔다. 1968년 훗날 밴드의 유산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감리하게 될 다각적 회사조직 애플 코어를 설립. 1970년 비틀즈의 해산 이후 모든 멤버들은 솔로 아티스트로서 성공을 누렸으며, 부분적으로나마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레논은 1980년 저격을 당하여 횡사하였고, 해리슨은 2001년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매카트니와 스타만은 아직도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로서 전세계적으로 6억장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 1위를 15회하여 가장 많은 넘버원 앨범 기록을, 빌보드 핫 100에서 20회로 가장 많은 넘버원 히트의 기록을, 또한 2,190만 장으로 영국에서 가장 많은 싱글 판매량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수상성적에 있어서는 그래미상 8회, 브릿 어워드 4회, 아카데미상 1회, 아이버 노벨로상 15회 수상.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멤버 전원이 개인으로서 1994년에서 2015년까지 헌액되었다. 《롤링 스톤》은 비틀즈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본다. 《빌보드》도 비틀즈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타임》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100인에서 그들을 선정해놓았다.
1956년 16세 존 레논은 리버풀 쿼리 뱅크 스쿨의 학우 몇 명과 함께 스키플 그룹을 결성한다. 일단은 더 블랙잭스(the Blackjacks)라고 자기들을 자칭했으나, 다른 현지의 그룹이 같은 회명을 쓰고 있음을 알게 되자 쿼리멘(the Quarrymen)으로 회명을 바꾸었다. 1957년 7월 15살 폴 매카트니가 레논과 만나게 되고 얼마 안 있어 쿼리멘에서 리듬 기타 자리를 맡게 된다. 1958년 2월 매카트니는 친구인 15살 조지 해리슨을 데려와 밴드를 구경시켜주었다. 해리슨은 레논에게 오디션을 보았고 레논은 해리슨에 제법 감응하였으나 너무 어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한 달간의 설득 끝에 매카트니가 주선한 두 번째 미팅에서 해리슨은 리버풀 버스의 2층에서 기악곡 〈Raunchy〉의 리드 기타 파트를 연주해보였으며, 쿼리멘은 해리슨을 리드 기타리스트로 영입하였다.
1959년 1월 레논의 쿼리 뱅크 친구들이 쿼리멘을 떠나고 레논은 리버풀 예술대학에서 수학하기를 시작했다. 3인의 기타리스트는 자신들을 조니 앤 더 문독스(Johnny and the Moondogs)라고 자칭하였다. 이들은 드러머를 구할 수 있을 때마다 로큰롤을 연주하고 다녔다. 레논의 예술대학 친구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그림을 한 점 판 돈으로 베이스 기타를 살 것을 종용당하여 1960년 1월 그룹에 들어왔다. 스튜어트는 밴드 이름을 버디 홀리와 더 크리케츠를 트리뷰트하는 이름으로서 비탈스(Beatals)로 바꿀 것을 건의하였다. 이 회명을 5월까지 쓰다가 같은 리버풀내기이자 팝 가수인 조니 젠틀의 배킹 그룹으로 잠시 동안 스코틀랜드 투어를 떠날 때 더 실버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7월 초 다시금 더 실버 비틀스(the Silver Beatles)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가 8월 중순 비틀즈(the Beatles)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비틀즈의 비공식 매니저 앨런 윌리엄스는 비틀즈의 함부르크 체류를 주선해주었다. 1960년 중순 오디션을 보아 피트 베스트를 드러머로 고용하였다. 이렇게 5인조가 된 비틀즈는 나흘 후 클럽의 주인 브루노 코슈미더와 3개월 반 동안의 체류가 될 계약을 맺고 리버풀을 떠나 함부르크로 이전하게 되었다. 비틀즈 역사학자 마크 루이손은 이렇게 서술한다. "8월 17일 그들은 땅거미가 질 무렵 함부르크에 당도하였다. 그때가 되면 홍등가는 그 활기를 되찾는다 ... 번쩍이는 네온 불빛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겠다며 소리질러댔고, 한편 제대로 옷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은 가게 창문에서 사업 기회를 찾아 부끄럼도 없이 앉아 있었다."
코슈미더는 스트립 클럽 몇 개소를 음악 공연장으로 개조해놓았으며, 일단은 비틀즈를 인드라 클럽에 배정시켰다. 이후 인드라 클럽이 소음 문제로 문 닫게 되자, 10월 비틀즈를 카이저켈러로 옮겼다. 코슈미더는 비클즈가 자신의 라이벌인 톱 텐 클럽과 자신들의 계약과 위배되게시리 공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한 달간의 해약통지서를 주고서는, 독일 당국에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함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미성년자 해리슨을 고발해버렸다.
11월 말 당국은 해리슨의 국외 추방을 주선하였다. 일주일 뒤 코슈미더는 매카트니와 베스트를 콘크리트 복도에서 콘돔에 불을 붙였다는 방화 혐의로 고발하였고 당국은 이들을 추방해버렸다. 12월 초 레논도 별수없이 리버풀로 돌아가야 했지만, 스튜어트는 2월 말까지 자신의 독일인 약혼녀 아스트리드 커처와 함부르크에서 머물렀다. 아스트리트는 비틀즈에 있어서 최초의 준전문가 사진가였다.
이후 이태 동안 비틀즈는 한동안 함부르크에서 지내면서 재미삼아 겸 철야 공연을 위한 에너지 보충용으로 프레루딘을 사용했다. 1961년 두 비틀즈의 두 번째 함부르크 계약체류에서 커처는 섯클리프의 머리를 '엑시'(existentialist, 실존주의자) 스타일로 잘라주었고, 이것은 이후 다른 비틀즈 멤버들에게도 옮게 되었다. 그해 초 섯클리프가 비틀즈를 떠나기로 하고 독일에서 예술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자 매카트니가 베이스를 담당하게 되었다. 1962년 6월까지 프로듀서 베르트 켐페르트가 이들 4인조와 계약을 맺고 폴리도르 레코드에서 발표될 토니 셰리던의 일련의 음반의 레코딩에서 배킹 밴드로 삼았다. 세션의 일환으로서 비틀즈는 폴리도르와 1년간 계약게 되었다. 1961년 6일 녹음하여 '토니 셰리던 & 더 비트 브라더스(Tony Sheridan & the Beat Brothers) 명의로 나온 싱글 〈My Bonnie〉는 발표된 지 4개월 뒤 무지크막트(Musikmarkt) 차트에서 32위 달성했다.
비틀즈가 함부르크에서의 두 번째 체류를 끝막을 무렵 비틀즈는 리버풀에서 머지비트 운동의 성장과 함께 제법 인기있는 그룹이 되어갔다. 다만 밤이면 밤마다 같은 클럽에 나와 많은 공연을 치루어야 하는 단조로운 생활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1961년 11월 비틀즈가 자주 공연하던 장소 중 하나인 캐번 클럽에서 비틀즈는 현지에서 음반점을 운영하고 음악 칼럼을 쓰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난다. 엡스타인은 후일 이렇게 회고한다. "듣자마자 그 음악이 좋더라고요. 신선하고, 진정성있고, 제가 생각기에 존재감이라고 하는 것을 가졌었습니다 ... 스타가 됨직했어요."
엡스타인은 몇 달간에 걸쳐 비틀즈의 환심을 사려 했으며, 결국 1962년 1월 비틀즈는 엡스타인을 매니저에 임명한다. 1962년 초-중엽에 걸쳐 엡스타인은 비틀즈를 베르트 켐페르트 프로덕션과 맺은 계약의무에서 비틀즈를 빼내오려고 하였다. 엡스타인의 노력에 함부르크에서 마지막으로 녹음 세션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달 일찍 계약을 끝내기로 협상하였다. 4월 독일로 돌아갔을 때 슬픔으로 제정신을 잃은 커처가 공항에 나와 섯클리프가 전날 뇌출혈로 사망했음을 알려주었다. 엡스타인은 이제 음반사들과 녹음 계약을 맺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였다. 영국 음반 계약을 얻기 위하여 엡스타인은 토니 셰리던의 배킹 밴드로서 좀더 녹음하는 것과 맞바꾸어 비틀즈의 폴리도르와의 계약의 조기 종료를 꾀하였다. 새해에 열린 데카 레코드 오디션에서 비틀즈는 낙방하였다. 데카 측은 "엡스타인 씨, 기타 그룹은 한물 갔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3개월 후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EMI의 팔로폰 레이블과 비틀즈가 계약을 맺게끔 해주었다.
1962년 6월 6일 마틴이 비틀즈와 처음 가지는 녹음 세션이 런던의 EMI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마틴은 베스트의 드럼 실력에 곧바로 불만을 엡스타인에게 표시하였고, 그 대신에 세션 드러머를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 애저녁에 베스트의 해고를 염두에 두고 있던 비틀즈는 8월 중순 그를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 소속의 링고 스타로 대체하였다. 9월 4일 열린 녹음 세션에서 스타를 드럼 자리에 놓고 〈Love Me Do〉를 녹음하였으나, 마틴은 이에 언짢아하며 결국 일주일 후의 비틀즈의 세 번째 세션 때 앤디 화이트를 데려와 〈Love Me Do〉, 〈Please Please Me〉, 〈P.S. I Love You〉 세 곡을 녹음하였다.
마티는 처음에는 스타 버전의 〈Love Me Do〉를 비틀즈의 첫 싱글로 삼으려 했으나 결국 스타가 탬버린을 치는 화이트 버전을 발표하기로 했다. 10월 초에 발표된 〈Love Me Do〉는 《레코드 리테일러》 차트에서 최고 17위를 달성했다. 비틀즈의 텔레비전 데뷔는 동월 말 지방 방송 《피플 앤 플레이스
출처: 비틀즈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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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멤버 링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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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
비틀즈 구성 조지 해리슨
비틀즈 구성 폴 매카트니
비틀즈 구성 링고 스타
비틀즈 구성 존 레논
비틀즈 멤버 존 레논
비틀즈 멤버 피트 베스트
비틀즈 멤버 링고 스타
비틀즈 구성 피트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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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구성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비틀즈 멤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비틀즈 멤버 채스 뉴비
비틀즈 구성 채스 뉴비
비틀즈 멤버 피트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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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구성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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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구성 레논-매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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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멤버 채스 뉴비
비틀즈 구성 토미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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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구성 조지 해리슨
비틀즈 구성 폴 매카트니
비틀즈 구성 존 레논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