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940
존 레논
John Lennon
존 윈스턴 오노 레논(출생명은 존 윈스턴 레논, 영어: John Winston Ono Lennon,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평화 운동가이다. 비틀즈의 결성・창립자, 공동작곡작사가, 공동가수, 리듬기타리스트, 사회 운동가로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레논은 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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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윈스턴 오노 레논(출생명은 존 윈스턴 레논, 영어: John Winston Ono Lennon,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평화 운동가이다. 비틀즈의 결성・창립자, 공동작곡작사가, 공동가수, 리듬기타리스트, 사회 운동가로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레논은 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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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윈스턴 오노 레논(출생명은 존 윈스턴 레논, 영어: John Winston Ono Lennon,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평화 운동가이다. 비틀즈의 결성・창립자, 공동작곡작사가, 공동가수, 리듬기타리스트, 사회 운동가로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레논은 그 음악, 저술, 그림, 영화, 인터뷰 따위에서 자신의 반항적 본성과 신랄한 위트를 표출하였다. 레논이 폴 매카트니와 가진 작곡 파트너십은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서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존 윈스턴 오노 레논(출생명은 존 윈스턴 레논(영어: John Winston Lennon), 영어: John Winston Ono Lennon,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평화 운동가이다. 비틀즈의 결성・창립자, 공동작곡작사가, 공동가수, 리듬기타리스트, 사회 운동가로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레논은 그 음악, 저술, 그림, 영화, 인터뷰 따위에서 자신의 반항적 본성과 신랄한 위트를 표출하였다. 레논이 폴 매카트니와 가진 작곡 파트너십은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서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리버풀 출신으로 청소년기 스키플 열풍에 편승하여 1956년 쿼리멘을 결성, 이 밴드는 1960년 비틀즈로 발전한다. "똑똑한 비틀(the smart Beatle)"로서 별칭된 레논은 원래 비틀즈의 사실상의 리더였으나 리더 자리는 시간이 흐름과 함께 매카트니에게로 이양되었다. 1960년대 중반 레논은 넌센스 저술과 라인 드로잉을 그러모은 《인 히즈 온 라이트》(In His Own Write)와 《어 스페니어드 인 더 워크스》(A Spaniard in the Works)를 출판하였다. 〈All You Need Is Love〉를 비롯하여 레논이 쓴 곡은 반전운동과 1960년대 반문화의 앤섬으로 채용되었다. 1969년 더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후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오노 요코와 출범시키고 2주간 반전시위 베드 인 포 피스를 벌였다. 또한 솔로 커리어를 추구하고자 비틀즈를 나갔다.
1968년과 72년 사이 레논과 오노는 여러 음반에서 공동작업하였으며 여기에는 아방가르드 앨범 트릴로지와 솔로 데뷔 앨범 《John Lennon/Plastic Ono Band》와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톱 10 싱글 〈Give Peace a Chance〉, 〈Instant Karma!〉, 〈Imagine〉, 〈Happy Xmas (War Is Over)〉가 포함된다. 1971년 뉴욕시로 이주하여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였으며 이는 3년간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레논에 대한 강제추방 시도를 낳는다. 1973년에서 75년까지 레논과 오노는 별거하였으며 이 시간 동안 레논은 엘튼 존(〈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과 데이비드 보위(〈Fame〉)와 협업하여 차트 1위를 2회 달성하였다. 5년간의 휴지기를 거쳐 레논은 1980년 음악에 복귀하여 오노와 공동작업한 《Double Fantasy》를 내놓았다. 그러나 앨범의 발표 3주 뒤 비틀즈의 팬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로 죽었다.
퍼포머, 작곡작사가, 공동작곡작사가로서 레논은 25개 싱글을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위에 올려놓았다. 레논의 베스트셀링 앨범 《Double Fantasy》는 1981년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1982년 레논은 브릿 어워드 우수기여상을 수상했다. 2002년 BBC 히스토리가 투표를 진행한 100인의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서 8위에 선정되었다. 《롤링 스톤》은 레논을 5번째로 위대한 가수이자 38번째로 위대한 아티스트로 선정하였다. 199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비틀즈의 멤버로서, 솔로 아티스트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회 헌액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상징적인 사회 운동가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존 윈스턴 레논은 영국의 전쟁 시기이던 1940년 10월 9일 리버풀 산부인과 병원에서 줄리아 스탠리 레넌과 상선 해병이었던 앨프리드 레논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앨프리드는 레논의 출생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 그의 부모는 레논의 이름을 그의 친할아버지 이름 존 "잭" 레논(John "Jack" Lennon)에서 따왔고, 중간 이름 윈스턴은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에서 따왔다. 레논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레논과 아내가 살던 리버풀의 뉴캐슬 로드로 꾸준히 일정한 생계비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1944년 2월 실종되어 생계비 지원이 끊겼다가, 6개월 후 가족을 돌보고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상태였던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는 그를 거절했다.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스미스가 리버풀 사회복지부에 두 번을 요청한 끝에 줄리아는 레논의 양육권을 미미에게 넘겼다. 1946년 7월 레논의 아버지는 미미 스미스를 찾아가 레논을 블랙풀에 데려왔고, 뉴질랜드로 가서 살 계획을 몰래 세운다. 줄리아는 당시 남자친구 바비 디킨즈와 함께 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레논의 양육권을 두고 격한 언쟁을 벌였고, 아버지는 5세의 레논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레논은 아버지를 두 번 선택했으나, 어머니가 떠나려고 하자 울면서 그녀를 쫓아갔다. 이후 아버지와는 20년간 연락이 끊겼다.
레논은 이후부터 자식이 없던 이모 미미 스미스와 이모부 조지 스미스와 함께 멘러브 애비뉴 251번지에서 지내게 되었다. 레논의 이모는 레논에게 다양한 짧은 이야기책을 사주었고, 낙농장 농부인 이모부는 레논에게 하모니카를 사줬고 같이 십자말 퍼즐을 풀기도 했다. 줄리아는 주기적으로 레논을 방문했으며, 레논은 11살 때부터 블롬필드 로드 1번지에 살던 어머니를 자주 방문했다. 줄리아는 자신을 방문한 레논에게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을 틀어주고, 밴조를 가르쳐 주었으며, 패츠 도미노의 노래 〈Ain't That a Shame〉의 연주법을 알려주었다. 1980년 9월, 레논은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반항적 본능에 대해 털어놓았다.
레논은 플리트우드에 살고 있던 7살 더 많은 사촌 스탠리 파크스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파크스는 레논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동네 영화관에 갔다. 방학 동안 파크스는 다른 사촌 레일라 하비와 함께 레논을 방문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블랙풀 타워 서커스를 보러 가거나 디키 발렌타인, 아서 에스키, 맥스 바이그레이브스, 그리고 조 로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파크스는 레논이 특히 조지 폼비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파크스의 가족이 스코틀랜드로 이사를 간 후, 이 세 명은 방학 때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파크스는 "존, 사촌 레일라와 전 아주 친했습니다. 존이 9살이었을 때부터 16살이었을 때까지, 저흰 에딘버러에서 차를 타고 더네스에 있는 가족 농장으로 갔어요."라고 회고했다. 레논이 14세가 되던 해인 1955년 6월 5일에 이모부 조지는 간 출혈로 5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레논은 성공회 신자로 자랐고, 도브데일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 후 1952년 9월에서 1957년까지 레논은 리버풀에 있는 쿼리 뱅크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 하비는 레논을 "태평스럽고, 유쾌하고, 마음 편하고, 활기차다"고 묘사했다. 레논은 가끔씩 직접 만든 학교 잡지 《데일리 홀》(The Daily Howl)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그에 대한 보고서에 "실패의 길의 걷고 있음이 틀림없다 ... 희망이 없다 ... 교실의 광대와 다름없다 ... 다른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한다"고 적으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2005년, 미국의 국립우편박물관이 그가 소년 시절 모은 우표 수집품을 입수했다.
1956년, 레논의 어머니는 5파운드 10실링을 주고 값싼 개로톤 챔피언 어쿠스틱 기타를 사서 레논에게 "빌려"주었다. 대신 주문할 때에는 누나인 미미가 레논의 음악적 포부에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미 스미스의 집이 아닌 자기의 집으로 배송을 요청했다. 미미는 자신이 언젠가는 유명해질 거라 떵떵거리는 레논의 주장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며 언젠가 음악을 지루하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종종 "기타 치는 건 아주 좋아, 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1958년 7월 15일, 레논이 17세가 되던 해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미미 스미스의 집에 방문 후 귀가하는 길에 차에 치여 사망했다.
레논은 교육 자격 검정 시험 GCE O 레벨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모와 교장이 나서서야 겨우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레논은 테디 보이 의류를 입기 시작했으며,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수업을 방해하는 걸로 유명해졌다. 결국 레논은 회화 강의와 그래픽 아트 강좌에서 연달아 쫓겨났고, 라이프 드로잉 수업에서 누드 모델의 허벅지 위에 앉는 등의 나쁜 태도로 인해 퇴학될 수도 있다고 경고를 받았다. 학년말 시험에서 떨어진 그는 친구들과 훗날 아내가 되는 신시아 파월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56년 9월, 15세의 레논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된 스키플 그룹인 쿼리맨을 결성했다. 1957년 여름, 쿼리맨은 스키플 반 로큰롤 반으로 이루어진 "영혼이 담겨진 세트 리스트"를 공연했다.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7월 6일 울튼의 성 베드로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두 번째 공연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매카트니는 미미가 "존의 친구들이 하류층인 것을 굉장히 의식했"으며, 레논을 방문하러 온 자신을 종종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고 증언했다. 폴의 형제 마이크는, 자신의 아버지도 매카트니를 "곤경에 빠뜨릴"까봐 레논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폴의 아버지는 포틀린 20번가에 위치한 매카트니의 집 거실에서 밴드의 리허설을 하게 도와주었다. 이 시기에 18세 레논은 자신의 첫 노래 〈Hello Little Girl〉을 작곡했고, 이 곡은 5년 후 더 포모스트가 불러 영국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다.
매카트니는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리드 기타 연주자로 제안했으나, 레논은 14살이었던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는 후에 조지를 위해 리버풀 버스의 위층에서 오디션을 잡아주었고, 해리슨은 레논 앞에서 〈Raunchy〉를 연주했다.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인 스튜어트 섯클리프는 후에 베이스 연주자로 밴드에 들어왔다.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과 섯클리프는 1960년대 초 "비틀즈"가 되었다. 그해 8월에 비틀즈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48일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연을 위해 드럼 연주자가 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피트 베스트를 영입했다. 레논의 이모는 당시 19세였던 레논이 함부르크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여행 대신 미술 공부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체류 이후 비틀즈는 1961년 4월에 두 번째로, 1962년 4월에 세 번째로 체류했다. 다른 밴드 멤버들처럼 레논은 함부르크에서 지낼 때 프레루딘을 접했고, 긴 밤 공연을 위한 각성제로 암페타민 따위의 마약을 복용했다.
1962년부터 비틀즈의 매니저를 맡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이전에 밴드 매니저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비틀즈의 초창기 복장 양식과 무대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레논은 처음에 엡스타인이 제안한 양복 차림의 전문적인 용모를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돈만 준다면 바보 같은 풍선이라도 입어야지."라며 받아들였다. 매카트니는 섯클리프가 함부르크에 남기로 하자 대신해서 베이스 연주자를 맡기로 했고, 드럼 연주자는 베스트에서 링고 스타로 교체되었다. 비틀즈는 1970년 해산까지 4인조 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밴드의 첫 싱글 〈Love Me Do〉는 1962년 10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에서 17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데뷔 음반 《Please Please Me》를 1963년 2월 11일 10시간에 걸쳐 녹음했다. 그 날 레논은 감기에 걸려있었고, 이는 그 날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 〈Twist and Shout〉의 보컬에 명백히 드러난다. 레논-매카트니는 14곡 중에서 8곡을 작곡했다. 레논은 이 때만 해도 앨범 제목 등 몇 가지를 빼곤 가사에 말장난을 넣지 않았다. 그는 "우린 그냥 노래를 썼어요 ...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단순히 노래를 쓴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가사들은 대부분 상관없었죠."라고 말했다. 매카트니는 1987년 인터뷰에서 다른 비틀즈 멤버들이 레논을 우상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작은 엘비스였습니다 ... 우리는 모두 존을 우러러보았죠.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또한 리더였고, 가장 재치있고 똑똑했어요.
비틀즈는 1963년 초부터 영국의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레논은 4월에 태어난 첫째 아들
출처: 존 레논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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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속한 시리즈 비틀즈
존 레논 멤버 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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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학교 Calderstones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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