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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ies of World War II
연합국(聯合國, 영어: Allies / United Nations)은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년) 기간 당시 일본 제국,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한 추축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적인 군사 연합체이다. 1942년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유엔(United Nations)이라고 불렀다.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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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ies of World War II
연합국(聯合國, 영어: Allies / United Nations)은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년) 기간 당시 일본 제국,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한 추축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적인 군사 연합체이다. 1942년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유엔(United Nations)이라고 불렀다.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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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聯合國, 영어: Allies / United Nations)은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년) 기간 당시 일본 제국,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한 추축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적인 군사 연합체이다. 1942년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유엔(United Nations)이라고 불렀다. 1941년부터 연합국의 주요 국가인 4대국으로는 영국, 미국, 소련, 중화민국이 있었다.
연합국의 구성국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1939년 9월 1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연합국은 영국, 프랑스, 폴란드와 영국령 인도 제국 같은 각국의 속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뒤이어 영연방의 자치령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가 연합국에 합류했다. 즉 전쟁 초 연합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연합국과 비슷했다.
추축국이 북유럽과 발칸반도를 침공하자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그리스, 유고슬라비아가 연합국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했던 소련은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침공하자 연합국에 가입했다. 1940년 9월부터 연합국에 일부 물자를 지원하던 미국은 그전까진 중립국을 유지했지만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을 당하자 그 후 추축국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국에 공식적으로 참전했다. 중화민국은 이미 1937년부터 일본과 전쟁 중이었으며 1941년 12월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입했다.
연합국은 영국, 소련, 미국 일명 "빅 3"라고 부르는 3개 국가가 주도했으며 세 국가는 각각 인력, 자원, 전략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했고 2차대전 승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연합국 지도자, 외교관, 군사 관료 간의 일련의 회의를 통해 동맹의 구성과 전쟁의 방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후 이뤄질 국제질서의 방향에 대해 결정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서 양국이 공동으로 발표한 대서양 헌장을 통해 연합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1942년 1월 1일 연합국은 전 세계 26국이 서명한 연합국 공동 선언에 따라 공식적인 동맹체가 되었다. 서명국에는 망명 정부에서부터 전쟁과는 거리가 먼 소국까지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 공동 선언에서는 빅 3와 중국을 공식적으로 "4대 강대국"으로 인정하여 전쟁 수행에 있어 이 4개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했으며, 이 4개국을 "강대한 수탁자"라거나 나중에는 유엔의 4명의 경찰관이라고도 불렀다.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식민지와 구 추축국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의 다양한 국가가 연합국에 가입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연합국과 이를 묶은 선언이 현대 유엔의 기초가 되었다. 연합국에게 남은 현대의 유산 중 하나로는 승전한 연합국 강대국으로만 구성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진 5개국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진행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상대편인 동맹국에게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독일 제국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손실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항에 반발했다. 종전 후 조약을 체결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가 크게 약화되고 굴욕받은 국민을 통치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은 유럽 전역, 특히 독일에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독일에서는 보복주의적인 민족주의자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베르샤유 조약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평화 조약 이후 결성된 아돌프 히틀러의 극우 나치당은 대중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용하여독일의 지배적인 정치조직으로 부상했다. 1933년 나치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 독일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샤유 조약의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하며 독일인이 다수 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다수 거주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전쟁 가능성은 높았지만 주요 강대국 중 누구도 또 다른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많은 정부가 유화정책과 같은 비군사적 전략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자 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중 하나였던 일본 제국은 이후 점점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적으로 변모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들어 민족주의적 정서가 고조되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국제 연맹은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로 비판했으나 1933년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의 행동을 규탄하고 제재를 시작했으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협상을 시도했던 미국이 특히 일본의 침공에 분노하여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주로 독일 민족의 비율이 높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지대를 독일에게 양도하여 히틀러를 달래는 협상인 뮌헨 협정이 체결된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했다. 뮌헵 협정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협정을 평화를 향한 중대한 승리라고 축하했지만, 협상 조항을 대대적으로 과시한 것은 유화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 유화정책을 주로 지지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 점령하자 히틀러는 외교적 합의를 지킬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31일 영국은 독일의 임박한 침공을 막기 위해 폴란드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또한 1921년부터 오랫동안 폴란드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은 서방 국가와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실패했고, 1939년 8월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스탈린과 있을 잠재적인 전쟁을 사전에 막았다. 불가침 조약에서는 지난 세계대전에서 자국 군대에 타격을 입었던 양 측의 전쟁을 막음과 동시에 중부유럽 및 동유럽의 국가를 독일과 소련 양국이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고 소련은 독일에게 석유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이틀 후인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지 약 2주 후에는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군사 결정을 조율하기 위해 영불 최고전쟁위원회를 수립했다. 런던에는 수십만명의 폴란드 군인이 참여한 폴란드 망명 정부가 수립되었고, 폴란드는 마지막까지 연합국의 일원으로 남았다. 조용한 겨울을 보내던 독일은 1940년 4월 서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해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를 빠르게 격파했다. 이후 모든 점령국은 런던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고 점령지에서 탈출한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뮌헨 협정을 위반한지 약 1년만에 주요 연합국은 영국 홀로 남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 두 국가는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기 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했는데 특히 1940년 9월 있었던 구축함과 해군기지 협정과 1941년 10월부터 영국과 소련에 전쟁물자를 제공한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있었다. 이에 대해 영연방과 소련은 미국의 제공물자보단 훨씬 적은 규모이긴 하지만 역 랜드리스로 같이 지원하기도 했다.
1941년 6월에는 런던에서 영국과 그 공동교전국인 4개 자치령(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와 8개 망명정부(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자유 프랑스가 모인 제1차 범동맹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후 세게에 대한 최초의 비전을 제시한 세인트제임스궁 선언이 발표되었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스탈린과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추축군이 소련을 전면 침공하자 소련은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게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7월 소련과 동맹조약을 맺고 양 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지원하며 개별로 평화 협상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뒤이어 8월에는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대서양 회의에서 전후 세계에 대한 영미의 비전을 담은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194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2차 범연합국 회담에서는 유럽의 8개 망명정부와 소련, 자유 프랑스군 대표는 대서양 헌장에 명시한 공동정책에 관한 원칙을 준수하는 방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1941년 12월에는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의 미국 및 유럽 국가 영토를 공격하자 미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참전했다. 이 시점에서도 일본의 침공에 저항하던 중국은 추축국 전체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1941년 말 제2차 세계 대전은 2개의 대전선이 형성되었다. 처칠은 영국, 미국, 소련 3개 대동맹을 언급했는데 이 3개 국가가 전쟁 수행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은 추축국이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본토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은 일본과 독일의 확장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이 미국을 직접 공격하기 전까지는 무력 사용을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1년 추축국의 배신으로 공격당한 소련은 독일의 호전성과 동쪽에서 무모한 일본의 확장을 경계했으며 특히 이전에 일본에게 패배했던 전적을 고려했을 때 일본도 경계했다. 소련은 미국과 영국이 제안했던 것처럼 양면전쟁의 이점 또한 인식하긴 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윈스턴 처칠은 일명 "빅 3 지도자"라고 불렸다. 이 셋은 대사, 대장군, 외무장관, 미국의 해리 홉킨스와 같은 특사를 통해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세계 최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세계 최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세계 최대 식민지 보유 국가인 영국 지도자가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에 일명 '대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세 국가의 관계는 전쟁 수행 능력과 전후 세계의 계획을 세우는 여러 차례의 주요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특히 더 특별한 관계로 연합참모본부를 구성하여 군사를 지휘했다.
세 국가 간의 수많은 회담도 개최되었는데, 처칠은 총 14회, 루즈벨트는 총 12회, 스탈린은 5회의 회의에 참석했다. 가장 눈에 띄는 회의는 세 명의 최고 지도자가 한데 모인 세 차례의 정상회담이다. 독일과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방침은 세 차례의 회담을 통해 발전하고 확정되었다.
테헤란 회담 (코드네임 유레카) - 최초의 세 명의 정상회담 (1943년 11월 28일-12월 1일)
얄타 회담 (코드네임 아르고넛) - 두번째 세 명의 정상회담 (1945년 2월 4일-11일)
포츠담 회담 (코드네임 터미널) - 세번째이자 마지막 세 명의 정상회담 (1945년 7월 17일-8월 2일)
전시에도 동맹이 깨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빅 3 지도자 간에는 수많은 여러 긴장이 존재했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중국을 함께 끼워넣어 세계 평화를 지키는 4명의 경찰관을 주창했다. '4대 강대국'이라는 표어는 연합국 공동 선언에 반영되긴 했지만 루즈벨트의 제안은 처음에 처칠이나 스탈린이 반대했다.
서방 연합국이 유럽에 제2전선을 여는 일이 지연되면서 분열이 발생했다. 스탈린과 소련은 영미 강대국과 '산도 테스트'를 하는데 제2전선의 개막을 사용했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인력을 동원해야 했고, 미국은 산업력을 최대한 동원하는 데 여유가 있었지만 "미국인의 인명 피해"는 최소화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다. 루즈벨트와 처칠은 1942년 북아프리카와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을 개막하고 독일 본토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으나 스탈린은 계속 더 많은 걸 요구했다.
1920년대 미소 관계는 긴장 상태였으나 1933년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무기대여법의 원래 조건은 소련에게 유리하게 수정되어 영국과 소련이 동등한 입장에서 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이후 소련으로부터 계속 지원했던 물자의 상환과 함께 이자를 기대할 수 있었고, 미국은 "전후 소련의 재건 노력"을 지원할 의향을 가지지 않아 소련이 몰로토프 플랜을 세우기도 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즈벨트를 "더 강력한 처칠에 비해 너무 가벼운 사람"이라고 말했고, 1943년에서 1945년까지 회담 기간 동안 소련의 요구가 점점 늘어나자 이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을 승계받자 트루먼은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며 긴장이 더 늘어났다. 루즈
출처: 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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