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레드 핫 칠리 페퍼스
Red Hot Chili Peppers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보컬리스트 앤서니 키디스, 베이시스트 마이클 "플리" 발자리, 드러머 채드 스미스,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록과 펑크 록, 그리고 헤비 메탈, 사이키델릭 록을 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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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Hot Chili Peppers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보컬리스트 앤서니 키디스, 베이시스트 마이클 "플리" 발자리, 드러머 채드 스미스,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록과 펑크 록, 그리고 헤비 메탈, 사이키델릭 록을 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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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핫 칠리 페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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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보컬리스트 앤서니 키디스, 베이시스트 마이클 "플리" 발자리, 드러머 채드 스미스,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록과 펑크 록, 그리고 헤비 메탈, 사이키델릭 록을 섞은 음악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보컬리스트 앤서니 키디스, 베이시스트 마이클 "플리" 발자리, 드러머 채드 스미스,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록과 펑크 록, 그리고 헤비 메탈, 사이키델릭 록을 섞은 음악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결성 당시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키디스와 플리를 제외하고 기타리스트 힐렐 슬로박과 잭 아이언스가 있었다. 하지만 슬로박이 1988년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면서 아이언스까지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드러머는 D. H. 펠리그로가 잠시 동안 맡은 후 채드 스미스가 영구적으로 맡게 되었다. 사망한 슬로박은 존 프루시안테가 대체하였다. 이 밴드구성으로 밴드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앨범인 1989년의 마더스 밀크(Mother's Milk)와, 1991년의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Blood Sugar Sex Magik)을 녹음했다.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은 엄청난 성공이었고, 1,200만 부나 팔려나갔다. 하지만 프루시안테는 밴드의 성공을 점점 더 불편해했고, 1992년 갑작스럽게 밴드를 떠났다. 키에디스, 플리, 그리고 스미스는 제인스 어딕션의 데이브 나바로를 그들의 다음 앨범인 1995년 원 핫 미닛(One Hot Minute)을 위해 고용했다. 하지만 원 핫 미닛은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의 갈채에 미치지 못했다. 얼마 후 나바로는 창조적인 변화들 때문에 해고되었다.
프루시안테는 밴드에서 떠나있는 동안, 약물중독이 매우 심해졌다. 1998년에, 그는 완전히 몸을 회복하였고, 플리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기에 밴드에 다시 들어왔다. 다시 뭉친 네 사람은 세계적으로 천오백만 장이나 팔려나가 그들의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 1999년의 캘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을 작업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들은 3년 뒤에 그들의 성공을 지속시켜준 바이 더 웨이(By the Way)로 돌아왔다. 2006년엔 결국 6개 그래미를 휩쓴 두 장의 앨범, 스타디움 아카디움(Stadium Arcadium)을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2009년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가 탈퇴했다. 2010년 새 기타리스트로 조쉬 클링호퍼가 영입되었다. 2019년 12월 플리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10년 동안 함께 연주한 조시 클링호퍼와 작별하고 존 프루시안테와 재결합함을 알렸다.
2011년 10월경 전 세계 음악계 종사자들의 최고 명예로 손꼽히는 록큰롤 명예의 전당 2012년 헌액 후보에 포함되었으며, 2011년 12월에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등과 함께 헌액이 확정되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페어팩스 고등학교 동창생인 앤서니 키디스와 힐렐 슬로백, 잭 아이언스, 그리고 마이클 플리 발자리로 1983년에 결성되었다. RHCP의 첫 번째 공연은 Grandia Room club에서 개리 앨런의 오프닝이었다. 어떤 노래는 밴드가 그냥 있을 때 키디스가 자작시인 Out in L.A를 불러 만든 것도 있다. 슬로백과 아이언은 원래 What is this?라는 다른 밴드에 있었다. 원래는 일회성 공연으로 되어 있었으나 공연이 재밌었고 그래서 밴드는 다음 주에도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성공에 따라, 멤버들은 밴드이름을 레드 핫 칠리 페퍼스로 바꿨고, 다양한 L.A클럽과 공연장에서 공연을 몇 번 더 했다. 이러한 초기의 공연에서 연주한 여섯 개의 곡을 밴드의 첫 데모 테잎으로 녹음했다.
공연으로부터 몇 달 후, 밴드는 EMI 와 계약했다. 이주전 What's this?가 MCA와 계약이 되었었고 슬로백과 아이언스는 What is this?에 집중하기 위해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그만두었다. 플리와 키디스는 Weirdos의 드러머 클리프 마르티네즈와 기타리스트 잭 셔먼을 영입했다.
Gang of Four의 기타리스트인 앤디 길이 그들의 첫 앨범 프로듀서로 고용되었다. 앤서니와 플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깔끔하고 좀더 라디오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원했다. The Red Hot Chili Peppers는 1984년 8월 10일에 발매됐고, 상업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처음엔 대략 25,000장 정도 팔렸고, 시장 인지도를 조금 얻었다. 이후 밴드는 64일간 60회 공연이라는 대단히 힘든 투어를 시작했다. 키디스와 셔먼의 음악적, 생활양식적인 불화가 지속됨에 따라 콘서트와 밴드의 일상 사이의 괴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셔먼은 곧 해고되었고 그와 함께 What is This?를 그만둔 슬로백이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돌아왔다.
조지 클린턴은 다음 앨범인 프리키 스타일리를 만들기 위해 선택되었다. 앨범은 알앤비와 펑키를 합친 사운드로 유명한, 웨인 주립 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디트로이트 스튜디오에서 작업되었다. 클린턴은 펑크와 훵크의 기본을 밴드의 연주목록에 집어넣었고, 그들의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하나로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밴드가 클린턴보다 길과의 관계가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1985년 8월 16일에 발매된 프리키 스타일리는 밴드의 첫 번째 발매보다도 좋지 못했고, 어느 차트에서도 아무 혁명을 가져오지 못했다. 다음 투어는 또한 밴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됐다.
클리프 마틴즈는 키에디스가 "마틴즈는 떠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라고 말할 때 1986년 여름에 그룹을 떠났다. 밴드는 일시적으로 잭 아이론스 전에 척 비스키츠를 고용했고 (아이론스가)일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계약 등을 모두 뒤로하고 재가입했다. 앤서니, 플리, 그리고 힐렐에게 큰 놀라움이었다. 칠리페퍼는 릭 루빈을 자신들의 세 번째 앨범을 위해 고용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냥 안하기로 했다. 밴드는 결국 마이클 베인혼을 고용했고 그게 밴드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곡들은 빠르게 쓰였고, 앨범은 모습을 갖춰갔으며 훵크의 느낌과 리듬을 프리키 스타일리로서 섞어냈고, 또한 펑크락과 훵크 메탈에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갔다. 네명의 원래 멤버들이 다시 모임으로 그들의 창조성 있고, 생명을 불어넣는 레코딩 프로세스를 새롭게 했다.
1987년 9월 29일, 디 업리프트 모포 파티 플랜이 발매되었고, 차트에서 볼 수 있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첫 앨범이 되었다. 빌보드 차트 200위 중 고작 148위를 했지만, 이것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처음 두 앨범에 비교해 굉장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키에디스와 슬로백은 둘다 심각한 약물중독에 빠졌었고, 자주 밴드를 포기했었으며, 그들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과 관계가 있는)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같은 날들이었다. 슬로백의 중독은 업리프트 투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88년 6월 25일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키에디스는 그 도시를 떠나 슬로백의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상황을 초현실적이고 꿈같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잭 아이론스는 그 후에, 친구가 죽어갔던 그룹에 있기 싫다고 말하고 그룹을 떠났다.
슬로백의 죽음과 아이론스의 탈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키에디스와 플리는 일시적으로 데드 케네디스의 드러머 펠리그로와 피펑크의 기타리스트 드웨인 블랙버드 맥나이트를 고용했다. 둘 다 눈에 띄는 성과를 가져오진 못했고 금방 바뀌었다. 어쨌든, 펠리그로의 짧은 임기 동안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일을 했는데,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긴 기간 동안 영향을 끼쳤다.-그의 밴드 합류로 밴드가 존 프루시안테를 (펠리그로의 지인이었다)오디션에서 기타리스트로 뽑게 되었다. 프루시안테는 레드 핫 칠리 페퍼가 맘에 들었고, 결과적으로 특히 오디셔닝이 맘에 들었다.
녹음 3주전에, 밴드는 몇 차례의 오디션에도 불구하고, 드러머를 아직 구하지 못했다. 마침내 밴드의 친한 친구가 그녀가 알던 채드 스미스라는, 드럼을 아침밥으로 먹을 정도로 드럼에 능숙한 드러머를 말해줬다. 키에디스는 스미스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했다; 어쨌든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의 오디션에서, 스미스는 플리의 연주템포에 맞춰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리드할 정도로 연주하여 밴드를 압도했다. 이 성공적인 파티 후에, 키에디스, 프루시안테, 그리고 플리는 스미스를 밴드에 들였다.
밴드의 네 번째 앨범의 녹음은 프루시안테의 기타소리를 크게, 힘있게, 헤비메탈에 쓰이는 거친 톤을 내기를 바라는 프로듀서 마이클 베인혼과의 불화가 방해했다. 이 수정은 자기가 선호하지 않는 연주 스타일이어서 프루샨테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스톤 콜드 부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네 번째 앨범, 마더스밀크가 1989년 8월에 발매됐고, 그들에게 첫 모던락 대박을 안겨주었다. -슬로백의 찬사에 의하면 녹미다운, 그들의 스티비원더 커버곡인 하이어 그라운드가 좋단다. 앨범은 빌보드 미국 차트 52위가 됐고, 이것이 밴드의 첫 골드레코드가 되었다.
1990에 밴드는 레이블을 워너 브로스로 바꿨다. 릭 루빈이 그들의 아직 그때까진 제목이 없던 5번째 앨범을 만들기 위해 고용되었다. 루빈은 그 다음의 모든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은 마더스밀크보다 훨씬 더 창조적인 작곡이었다.,키에디스는 이렇게 말했다,“이제 난 새로운 곡을 작곡해야한다".
밴드는 새 앨범을 만드는 6개월간의 힘든 여정을 시작했다-리허설, 작곡, 그리고 생각의 구체화의 긴 기간. 하지만 루빈은 일반적인 레코딩스튜디오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그는 좀 덜 전통적인(현대적인)장소에서 더 잘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엄청나고, 크고, 현대적인 랜드마크의 지중해 사람으로서 밴드가 살던 그곳에 돌을 던졌다."거의 다음 달 정도까지 프루샨테, 키에디스, 그리고 플리는 잠시 격리되어 쉬었는데, 러코딩 작업 기간에 집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다. 스미스는 어쨌든 집에서 살지 않기로 했는데 누가 찾아올까봐서였다.
밴드는 앨범의 이름을 짓지 못했지만 루빈은 한 특정한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이라는 곡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비록 주제가 된 곡은 아니었지만 릭은 그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완전 제격인 제목"이라 생각했다.
1991년 9월 24일,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이 발매됐다. 기브 잇 어웨이가 첫 싱글로 발매됐다;이건 1992년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하드락 퍼포먼스 윗 보컬 상을 받았고 모던 록 차트에서 처음으로 싱글 1위를 한 곡이었다. 발라드 곡이었던 언더 더 브릿지는 그 다음에 발매된 싱글이었고, 빌보드 핫 100차트서 2위를 했고, 이는 밴드가 그 차트에서 얻은 가장 높은 성과였으며, 밴드의 대표적인 곡들중 하나가 되었다. 브레이킹 더 걸과 썩 마이 키스와 같은 다른 싱글들도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다. 그 앨범은 스스로 천 이백만장이나 팔려 세계적인 센세이션이 되었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팬은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은 롤링 스톤즈 매거진의 음악500선에서 310번째 앨범이 되었고, 1992년 미국 3위로 떨어졌는데 발매된 지 1년 후였다.
1991년,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의 성공을 즐기고 있을 때, 밴드는 안드레 아가씨가 진행하며 나이키 슈즈가 지원하는 롸큰롤 테니스라는 국제 광고 캠페인에 참여하게 된다.
밴드의 성공과 약물중독은 그들의 고통을 프루시안테에게 모두 떠안겼는데 프루시안테는 1992년 5월 블러드 슈거 섹스 매직 일본 투어중 무뚝뚝하게 밴드를 떠나버렸다. 밴드는 1992년 롤라팔루자 페스티벌의 처음을 아릭 마샬이라는 기타리스트로 대신하여 장식했다.(그는 심슨 시즌포의 크러스티 게츠 캔슬드 피날레에서 나왔고, 브레이킹 더 걸,이프 유 해브 투 애스크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그리고 로스 앤젤레스의 기타리스트 지스 토비야스와도 잠시 함께 했었다. 케미스트리는 틀렸다고 밴드가 주장하며 쉬고 있을 때 함께였고, 그도 또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제인스 어딕션의 데이브 나바로를 세웠다.
데이브 나바로가 1994년 우드스탁에서 처음 밴드와 함께 나타났는데, 거기서 밴드는 거대한 전구의상을 크롬옷에 위험하게 부착하여, 악기를 거의 연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밴드가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세명의 원래 멤버와 나바로사이의 관계에 불화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의 다른 음악적 배경은 그들이 함께 연주할 때, 공연을 힘들게 했고, 그것은 다음 해에 나타났는데, 그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처음이
출처: 레드 핫 칠리 페퍼스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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