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947
데이비드 보위
David Bowie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영어: David Robert Jones, 1947년 1월 8일 ~ 2016년 1월 10일)는 데이비드 보위(영어: David Bowie /ˈboʊi/ 데이비드 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인 가운데 한 명인 그는 평론가와 음악가를…
인물1947
David Bowie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영어: David Robert Jones, 1947년 1월 8일 ~ 2016년 1월 10일)는 데이비드 보위(영어: David Bowie /ˈboʊi/ 데이비드 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인 가운데 한 명인 그는 평론가와 음악가를…
이 항목이 포함된 사건 파일에서 정보와 관계를 함께 살펴보세요.
이 항목이 포함된 사건 파일이 아직 없습니다.
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영어: David Robert Jones, 1947년 1월 8일 ~ 2016년 1월 10일)는 데이비드 보위(영어: David Bowie /ˈboʊi/ 데이비드 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인 가운데 한 명인 그는 평론가와 음악가를 막론하고 치하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혁신적 작품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영어: David Robert Jones, 1947년 1월 8일 ~ 2016년 1월 10일)는 데이비드 보위(영어: David Bowie /ˈboʊi/ 데이비드 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인 가운데 한 명인 그는 평론가와 음악가를 막론하고 치하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혁신적 작품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의 50년 경력은 재창조와 시각적 표현으로 주목되었으며, 그 음악과 무대 연출은 대중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보위는 미술, 음악, 디자인을 공부하였으며 1963년 음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1969년 발표한 〈Space Oddity〉가 영국 싱글 차트에서 톱 5에 진입되어 첫 성공이라고 할 것을 거둔다. 시행착오의 기간을 거쳐 1972년 글램 록 시대에 다시 등장하여 화려하고 중성적인 또 다른 자아 지기 스타더스트로 분장하였다. 이 캐릭터로써 보위는 싱글 〈Starman〉 및 앨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의 성공을 견인하였고 또한 폭넓은 인기를 누린다. 1975년 보위는 스타일을 또 한번 바꾸어 자신이 "플라스틱 솔"이라고 특징지은 사운드를 추구하였으나 이 때문에 많은 영국 팬들이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커다란 크로스오버 성공을 거두었다. 1위를 한 싱글 〈Fame〉 및 앨범 《Young Americans》가 이 시대의 대표적 산물이다. 1976년 보위는 컬트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에 출연하고 앨범 《Station to Station》을 발표한다. 1977년 다시 한번 스타일을 바꾸어 일렉트로닉을 도입한 앨범 《Low》를 발표한다. 이것은 일명 '베를린 삼부작'으로 통하는 브라이언 이노와의 3개 합작품의 첫 번째 작품으로서 1977년 《"Heroes"》와 1979년 《Lodger》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앨범들은 모두 영국 톱 5에 진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호평을 듣고 있다.
1970년대 말의 굴곡진 성공 이후로 보위는 세 개의 1위 히트작을 배출해낸다. 바로 1980년 싱글 〈Ashes to Ashes〉, 그 앨범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 〈Under Pressure〉(1981년 퀸과의 합작품)이 그것이다. 1980년대 《Let's Dance》(1983년)를 비롯하여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1988년에서 92년 사이 하드 록 밴드 틴 머신을 결성, 리더로서 활동하였으며 93년 다시 솔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보위는 다시금 인더스트리얼과 정글 따위의 음악 스타일을 실험하였다. 배우 활동 역시 계속되었다. 1983년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잭 셀리어스 소령 역을, 1986년 영화 《사라의 미로여행》에서 고블린 왕 역을, 1988년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 역을, 2006년 영화 《프레스티지》에서 니콜라 테슬라 역을 맡았다. 그 밖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텔레비전, 카메오 출연도 행하였다. 2004년 순회공연을 중단하였으며 2006년에 이루어진 자선행사에서의 공연이 마지막 실황공연이 되었다. 2013년, 10년 남짓한 녹음중단을 뒤로하고 앨범 《The Next Day》을 발표한다. 그리고 간암으로 뉴욕 자택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69세 생일과 2016년 앨범 《Blackstar》가 발표된 지 이틀만이었다.
살아생전 보위는 1억 장을 웃도는 음반을 팔아치워 역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음반판매량인증은 영국에 있어서는 10회 플래티넘, 11회 골드, 8회 실버 앨범 인증을 받았으며 1위를 달성한 앨범을 11장 발표하였다. 미국에 있어서는 5회 플래티넘, 9회 골드 인증을 받았다.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롤링 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그를 선정하였다. 2022년 현재 보위는 21세기에 가장 많은 비닐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다.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는 1947년 1월 8일 런던 브릭스턴에서 태어났다. 모친 마가렛 메리 "페기"(Margaret Mary "Peggy")는 켄트주 체리턴 근교 숀클리프 군대막사 출신이다. 마가렛의 친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맨체스터에 정착하였다. 마가렛은 로열 턴브릿지 웰스에 위치한 영화관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였다. 부친 헤이우즈 스텐톤 "존" 존스(Haywood Stenton "John" Jones)는 요크셔주 동카스터 출신으로 아동자선단체 버나도스의 홍보담당자였다. 일가는 브릭스턴과 스톡웰의 경계에 위치한 남런던 자치구 램버스구의 스탠스필드가 40번지에 거주하였다. 보위는 6살 때까지 스톡웰 유아학교에 다녔으며, 타고난 외곬수에 악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1953년부터 보위는 가족들과 비클리로 이주하였고 그다음에는 브롬리 커먼에를 갔다가 1955년 선드리지 파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버트 애시 초등학교에 다녔다. 보위의 목소리는 학교합창대에 "적합하다"고 평가되었고, 리코더 실력은 남들보다도 뛰어났다. 그 나이 9살 되던 해에 새롭게 도입된 음악운동반에서 그가 보여준 춤은 굉장히 창의적인 것이었다. 선생은 그 연기를 보고 어린아이 치고는 "선연히 예술적"이며 그 침착성은 "믿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동년 부친이 미국산 음반을 가져오면서 그의 음악에 관심에 불이 붙었다. 음반의 가수들로는 더 틴에이저스, 더 플래터스, 패츠 도미노, 엘비스 프레슬리(마침 생월일이 같았다), 리틀 리처드 등이 있었는데, 보위는 리틀 리처드의 노래 〈Tutti Frutti〉를 듣고서는 후일에 묘사하기를 "신을 듣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보위가 프레슬리를 처음 조우한 것은 사촌 크리스티나가 발표된 직후에 있던 〈Hound Dog〉를 틀며 춤을 추고 있던 것을 봤던 때였다. 크리스티나의 말에 따르면 그녀와 데이비드는 "홀려버린 엘프들처럼" 음반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아티스트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듬해 말 보위는 우쿠렐레와 차상자 베이스를 갖게 되었으며, 친구들과 스키플 세션을 하며 연주하였다. 또한 피아노도 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현지의 울프 클럽에서 행해진 프레슬리의 척 베리의 노래로 구성한 그의 무대 연예는 "아주 넋을 빼놓았다 ... 별세계에서 온 사람같았다"고 형용되었다. 아기 때부터 엔터테이너가 됨을 꿈꿔온 아들의 꿈을 독려하기 위하여 1950년대 말 데이비드의 부친은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를 준비하던 가수들과 그 밖의 다른 공연인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앨마 코건과 토미 스틸이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일레븐플러스 시험을 치른 이후 보위는 브롬리 기술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전기작가 크리스토퍼 샌드포드가 다음과 같이 쓴바 기술학교 치고는 특이한 곳이었다.
그 지위에도 불구하고 1958년 데이비드가 도착할 당시 그곳은 여느 [영국] 공립학교 못지않게 신비로운 의식이 풍부하였다. 18세기 정치인을 지낸 피트와 윌버포스의 이름을 딴 집들이 존재하였다. 제복이 존재했으며, 정교한 상벌(賞罰) 시스템이 존재하였다. 국어, 과학, 특히나 디자인에 역점을 두었으며, 오웬 프램프턴의 지도 아래 학구적 분위기가 번성하였다. 데이비드의 말에 따르면 프램프턴은 지성이 아닌, 인격의 힘으로써 지도해나가고자 했다. 브롬리 테크의 그의 동료들은 아무도 유명하지 않았음에도 예술에 있어 가장 축복받은 학생을 배출해냈다. 몹시도 민주주의적이었던 제도 아래 프램프턴은 자신의 아들 피터와 데이비드가 음악적 커리어를 걷도록 적극 독려하였으며, 둘의 파트너십은 30년간 잠시도 멀어지지 않았다.
보위의 외가쪽 이복형제 테리 번스야말로 어린 시절 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번스는 보위보다 10살 손위의 형이었는데 조현병과 발작증이 있었으며, 집과 정신병동을 번갈아가며 살았다. 보위와 같이 살던 와중에 그는 보위에게 평생가는 영향력을 그에게 아로새겼다. 바로 모던 재즈, 불교, 비트 시, 오컬트를 그에게 소개한 것이다. 번스 외에도 보위의 대가족 구성원 가운데 상당수가 조현병증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특히나 이모는 보호시설 신세를 지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뇌절제술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초기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보위는 예술, 음악, 레이아웃과 조판을 비롯한 디자인을 수학하였다. 번스가 모던 재즈를 소개해준 이래 그가 찰스 밍거스나 존 콜트레인 등에 가지는 열의가 어찌나 컸던지 모친은 1961년 그래프턴 색소폰을 보위에 사주기에 이른다. 보위는 곧 바리톤 색소폰주자 로니 로스의 수업을 받게 되었다. 1962년 벗 조지 언더우드가 한 여자를 두고 그와 격투한 끝에 보위의 왼쪽 눈을 때려 심각한 부상을 입게 한다. 네 달에 걸쳐 병원신세를 지는 동안 일련의 수술을 받았으나, 의사는 부상이 완벽하게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단히 못박아놓았다. 그리하여 보위는 완전치 못한 거리감각과 동공부동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 홍채색을 서로 다르게 만들어 후일에 홍채이색증이 아닌가 하는 설을 만들게도 하였다. 보위는 눈은 어찌되었든 보위에 있어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보위와 있었던 싸움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그와 좋은 사이를 유지했으며, 언더우드는 보위의 초기 앨범의 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62년 15세가 되던 해 보위는 자신의 첫 밴드 더 콘라즈(the Konrads)를 결성한다. 기타를 중심으로 한 로큰롤을 동네 청년모임이나 결혼식에서 연주하고는 했는데 천변만화하는 라인업은 4명일 때도 8명일 때도 있었다. 언더우드가 그중의 한 명이었다. 이듬해 보위는 기술학교를 퇴학하고 부모에게 팝 스타가 되겠노라는 자신의 꿈을 알렸다. 모친은 전기기술자의 조수로서 고용되도록 주선을 해주었다. 콘라즈의 멤버들이 다들 유명해지는 데 시큰둥하자 좌절감을 느낀 보위는 더 콘라즈를 떠나 다른 밴드로 옮기는데 더 킹 비스(the King Bees)라는 모임이었다. 그는 마침 세탁기 사업으로 부자가 된 사업가 존 블룸에게로 편지를 띄웠는데 그 내용이 이러했다. "비틀즈를 위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해준 일을 우리에게 해주시오. 그리고 또 한번 누거만을 벌어봅시다." 블룸은 이 제안에 응하지는 않았으나 딕 제임스의 파트너 레슬리 콘으로 이첩하여 보위의 첫 개인 매니지먼트 계약이 성립되었다.
콘은 서둘러서 보위의 홍보를 진행하였다. 데뷔 싱글 〈Liza Jane〉이 데이비 존스와 더 킹 비스의 명의를 달고 발표되었으나 이렇다 할 성공은 없었다. 더 킹 비스에서도 불만족을 느끼고, 만날 하울링 울프나 윌리 딕슨의 커버를 하는 데 질려버린 보위는 이곳도 떠나버리고 이번에는 더 매니시 보이스(the Manish Boys)라는 블루스 그룹에 들어갔다. 포크와 솔을 버무린 음악을 하는 그룹이었다. 보위는 "나는 믹 재거가 되고자 했습니다"라고 후일 회고하였다. 여기서 발표한 바비 블랜드의 〈I Pity the Fool〉의 커버는 〈Liza Jane〉과 견주어 더 나을 게 없는 성적이었다. 그리하여 보위는 또 다시 팀을 옮겨버렸는데 더 노어 서드(the Lower Third)라는 더 후의 영향을 크게 받은 블루스 트리오로 이적하였다. 여기서 발표한 〈You've Got a Habit of Leaving〉마저 실패하자 콘과의 계약은 파탄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중음악계를 떠나 "새들러스 웰스에서 무언극을 배워보겠다"고 선언한 보위였으나 더 로우 서드를 탈퇴하지는 않았다. 새롭게 매니저가 돼준 랄프 호턴은 그와 파이 레코드를 계약시키는 데 있어 큰 공헌을 한다. 랄프는 그가 솔로 아티스트로 전향하는 데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홍보담당자 토니 해치는 보위와 계약하는 대신 자작곡을 쓰는 것을 그 조건으로 했다. 1960년대 중반 더 몽키스의 데이비 존스와 이름으로 혼란을 가져오자 보위는 예명을 데이비드 보위로 바꿔버렸다. 이 이름은 19세기의 미국 개척자 제임스 부이와 그가 유행시킨 그의 칼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1966년 처음으로 데이비드 보위 명의로 싱글이 나왔으니 더 로어 서드와 녹음한 〈Can't Help Thinking About Me〉였다. 그러
출처: 데이비드 보위 (CC BY-SA)
확인된 구조화 정보, 사용자 의견, AI가 찾은 관계를 구분해 표시해요.
아직 댓글이 없어요. 먼저 한마디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