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930
장뤼크 고다르
Jean-Luc Godard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2022년 9월 13일)는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자기 영화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작가로서, 고다르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대본 작가…
인물1930
Jean-Luc Godard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2022년 9월 13일)는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자기 영화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작가로서, 고다르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대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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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뤼크 고다르 국가 스위스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2022년 9월 13일)는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자기 영화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작가로서, 고다르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대본 작가를 겸임하며, 편집까지 스스로 담당하기도 했다. 가끔씩 단역으로 자기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2022년 9월 13일)는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자기 영화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작가로서, 고다르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대본 작가를 겸임하며, 편집까지 스스로 담당하기도 했다. 가끔씩 단역으로 자기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에릭 로메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처럼 영화 평론가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주로 《가제트 뒤 시네마》, 《카예 뒤 시네마》, 《아르》에 글을 기고했다. 동시에 스위스의 그랑드디상스 댐 건설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콘크리트 작전Opération béton (1954)》, 모파상에 영감을 받아 예산 없이 찍어낸 《아양떠는 여자Une femme coquette (1955)》, 에릭 로메르와 함께 멋부린 문체로 쓴 《모든 청년들은 파트리크라고 불린다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또는 샤를로트와 베로니크Charlotte et Véronique》, 프랑수아 트뤼포가 촬영하고 고다르가 이미지를 편집한 《물의 이야기Une histoire d'eau (1958)》, 마지막으로 《샤를로트와 그녀의 정부Charlotte et son jules (1958)》같은 16mm 단편을 찍기도 했다.
1959년, 《네 멋대로 해라》의 촬영과 함께 장편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누벨 바그의 시조격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1960년대에 고다르는 일 년에 여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여러 기획을 진행한다. 1960년, 고다르는 알제리 전쟁에 관한 영화 《작은 병정Le Petit Soldat》과 뮤지컬에 대한 경의를 담은 영화 《여자는 여자다Une femme est une femme》를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매춘을 하는 젊은 여성에 관한 영화 《자기만의 인생Vivre sa vie (1962)》, 전쟁에 관한 신작 《기관총 부대Les Carabiniers (1963)》, 영화계를 다룬 영화 《경멸Le Mépris (1963)》을 찍는다. 고다르는 1964년 《국외자들Bande à part》과 《유부녀Une femme mariée》를 찍으며 영화 활동을 이어간다. 1965년, 고다르는 SF 영화 《알파빌, 레미 코숑의 기이한 모험Alphaville, une étrange aventure de Lemmy Caution》을 감독하며, 그 다음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로드 무비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를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청춘들에 관한 영화 《남성 여성Masculin féminin》, 《메이드 인 USAMade in USA》, 다시 매춘이라는 주제를 다룬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 《중국 여인La Chinoise (1967)》, 《주말Week-end (1967)》을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일류 영화인으로서, 지식인 계층과 예술계를 이끄는 인물 중 한 명이 된다. 1968년, 그의 몇몇 이전 영화에서 이미 예견된 5월 사태는 기존 영화 체계와의 단절의 기회였다. 고다르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이 되며, 소외당한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정치 영화를 만들고자 시도하며,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는 집단 필명하에 영화를 제작한다. 이 시기 고다르의 영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74년부로, 고다르는 동거녀 안마리 미에빌과 함께 비디오 촬영을 실험하며, 텔레비전 매체를 통하여 작업하며, 영화와는 거리를 둔다.
고다르는 1980년대 《도망쳐라 (인생)Sauve qui peut (la vie)》으로 영화계로 복귀한다. 이후 그는 마치 1960년대처럼 영화계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1980년대 말, 고다르는 영화의 영화적인 역사를 구성하고자 시도한 《영화사Histoire(s) du cinéma》라는 제목의 영화-에세 연작 제작에 몰두하며, 1998년 완성하게 된다. 2000년대,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Éloge de l'amour (2001)》, 《우리의 음악Notre musique (2004)》, 《필름 소셜리즘Film Socialisme (2010)》과 같은 영화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또한 고다르는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고다르는 가장 야심적으로 계획한 전시를 결국 단념했지만, 원 전시 계획의 축소판은 《Voyage(s) en utopie. À la recherche d'un théorème perdu. JLG 1945-2005》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장 뤽 고다르는 1965년 《알파빌》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였으며, 두 은곰상(《네 멋대로 해라》로 감독상, 《여자는 여자다》로 심사위원 그랑프리)을 수상했다. 고다르는 또한 1982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영예상(경력상)을 받았으며, 1983년 《카르멘이라는 이름Prénom Carmen》으로 황금사자상 작품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고다르는 2014년 《언어와의 작별Adieu au langage》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으며, 1987년과 1998년 세자르 공로상을 두 번 받았고, 2010년 자신의 전체 경력으로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다. 2018년 고다르는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이미지 북 Le Livre d'image》으로 황금종려상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2022년 9월 13일, 스위스 자택에서 조력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장 뤽 고다르는 1930년 12월 3일, 파리 7구 코냑제가 2번지에서 넷째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30년 1월 6일 태어난 · 누나 라셸은 1993년 사망했다. 여동생 베로니크는 사진가이다.
장 뤽 고다르의 아버지 폴 고다르(1899-1964)는 1899년 5월 1일 프랑스 북부 출신의(르 카토-캉브레지) 어머니와 상세르의 옛 개신교 가문 태생으로 셰르 출신의 아버지 조르주 고다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6년 폴 고다르는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민을 가서, 처음에는 브베, 이후 제네바에 자리를 잡는다. 폴 고다르는 이후 의학을 공부했으며, 1922년 파리에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파리와 스위스를 오고 가며 일을 했다.
장 뤽 고다르의 어머니, 오딜 모노(1909-1954)는 1765년 제네바에서 태어난 장 모노 목사와 1802년 태어난 아돌프 모노 목사의 후손으로 프랑스의 개신교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다르의 외할아버지, 쥘리앵 모노는 동양 금융 회사(Société financière d'Orient)를 운영하였으며, 파리·네덜란드 은행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1924년, 쥘리앵 모노는 라스파유 대로 16번지에 있는 건축가 앙리 소바주가 설계한 아파트를 산다. 그는 작가들과 자주 만나며, 1924년 만난 폴 발레리와 매우 친밀히 지내게 된다. 시인을 대단히 찬미하던 아돌프 모노는 방 한쪽에 시집과 시인들의 원고, 서간을 모으고, 그 방을 "발레리아눔valerianum"이라 이름 붙였다. ·
폴 고다르는 오딜 모노와 1928년 10월 16일 루브르 예배당에서 결혼한다. 1933년, 폴 고다르는 스위스의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어, 고다르 가족은 1936년 니옹으로 가기 전에 니옹과 롤 사이에 있는 레망 호숫가의 프리외레가 4번지에 자리를 잡는다. 장 뤽 고다르는 1936년부터 니옹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고다르는 유년 시절에 특히 운동에 빠져, 축구, 스키, 농구 등을 했다. 고다르의 유년기에 있어서는 개신교가 큰 역할을 했다. 어린 장 뤽 고다르의 첫 관심은 미술이었다. 고다르가 어린 시절 그린 작품은 폴 클리와 오스카르 코코슈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다르는 앙티쉬르레망에 있는 외조부 소유의 저택에서 방학을 보냈다.
1940년 6월,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장 뤼크 고다르는 파리의 외조부모와 함께 지냈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다시 가기 전, 고다르는 1940년 개학을 앞두고 있을 때 브르타뉴에 살던 이모 오드에게 보내졌다. 고다르의 외가인 모노 가문은 공화파이자 좌파에 가까웠으나, 외할아버지 쥘리앵 모노는 더 보수적이었고, 페탱 장군을 옹호하며, 친독 신문을 읽었다. 이와 반대로, 고다르의 부모는 적십자에서 일하며 친영파에 가까웠다.
전후, 장 뤽 고다르는 니옹의 콜레주(중학교)에서 졸업장을 따고, 바칼로레아를 치기 위하여 파리의 리세 뷔퐁(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고다르는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별거를 하게 된다. 고다르의 아버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시달리며, 처가의 태도를 견딜 수 없었는데, 어머니는 친정과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고다르의 어머니는 1949년 남편을 떠나 제네바로 이사갔으며, 이후 1951년 로산으로 가게 되며, 결국 1952년 11월 고다르의 부모는 이혼하게 된다. 고다르는 이후 아사스가에 있는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장 슐룅베르제의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거주하게 된다. 고다르는 학업에 흥미를 잃었으며 1947년 바칼로레아 취득에 실패한다. 고다르는 영화 클럽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고다르는 영화에 눈을 뜬 것뿐만 아니라, 《레뷔 뒤 시네마》에 적힌 비평문을 읽기도 했는데, 특히 오늘날 에릭 로메르로 더 잘 알려진 모라스 셰레르의 글을 읽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장 뤽 고다르는 니옹에서의 청소년기 때부터 도둑질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습관은 편집증적이 되었으며, 장 뤽 고다르는 친척이나 친구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장 슐룅베르제의 서재에서 책을 훔치고, 퐁뇌프에 그것을 팔기도 했다. 또한 고다르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에서 폴 발레리의 작품을 훔치고, 외할아버지 집과 마주보고 있는 갈리마르 서점에 팔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장 뤽 고다르는 17살에 집안의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얼마 지나, 그는 또 1952년 《카예 뒤 시네마》의 [[금고에, 그리고 팔레루아얄 근처에 있으며 친구의 아버지 샤를 비치가 운영하는 카페 드 라 코메디의 계산대에 손을 대기도 했다. 가족과 연을 끊은 고다르는 1947년 11월 《집안. 또는 전체의 인상Le Cercle de famille. Ou impressions d'ensemble》이라는 제목의 가족에 대한 비방글을 쓴다.
출처: 장뤽 고다르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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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는 1948년 스위스로 돌아와서, 로산의 콜레주 레마니아에서 바칼로레아를 준비한다. 재수를 하고도 바칼로레아에 실패한 후, 그는 삼수 끝에 1949년 바칼로레아를 취득한다. 이 시기, 고다르는 미술, 영화, 문학 중에 무엇을 할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샤를페르디낭 라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린Aline》이라는 제목의 첫 시나리오를 썼다.
1949년 가을, 고다르는 파리 소르본 인류학과에 입학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학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소르본에서 고다르는 훗날의 쉬잔 쉬프망이자 많은 영화에서 고다르와 함께 협업하게 되는 쉬잔 클로셴들러(Suzanne Klochendler)와 작가 장 파르뷜레스코(Jean Parvulesco)를 만나게 된다. 고다르는 조르주 메레디트의 《약혼녀La Fiancée》를 원작으로 한 두번째 시나리오, 《아이러니의 중단, 클레르La Trêve d'ironie, Claire》를 집필한다. 이 시기 고다르는 영화를 엄청나게 많이 보았다. 앙리 랑글루아가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고다르는 쉬잔 클로셴들러, 프랑수아 트뤼포, 장 그뤼오, 자크 리베트와 정기적으로 만나게 된다. 고다르는 또한 1947년 프레데리크 프뢰셸이 설립한 카르티에 라탱 영화 클럽에도 드나들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모리스 셰레르, 폴 제고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그뤼오, 리베트를 만난다. 이 영화 클럽은 《카르티에 라탱 영화 클럽 회보Bulletin du ciné-club du Quartier latin》를 간행했는데, 이 회보는 이후 1949년 말 《가제트 뒤 시네마》라는 이름의 진짜 영화지가 된다. 19살에 쓴 고다르의 첫 비평이 실린 것 역시 바로 이 회보이다. 고다르는 1950년 6월부터 11월까지 12편의 기사를 본명으로, 또는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