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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Russian Empire
러시아 제국은 1721년 11월에 선포된 이래로 1917년 3월에 해체될 때까지 북부 유라시아의 대부분에 걸쳐 있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영토 면적은 24,975,193km2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육지 면적의 대략 6분의 1에 해당하며 대영 제국과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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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은 1721년 11월에 선포된 이래로 1917년 3월에 해체될 때까지 북부 유라시아의 대부분에 걸쳐 있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영토 면적은 24,975,193km2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육지 면적의 대략 6분의 1에 해당하며 대영 제국과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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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러시아 제국은 1721년 11월에 선포된 이래로 1917년 3월에 해체될 때까지 북부 유라시아의 대부분에 걸쳐 있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영토 면적은 24,975,193km2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육지 면적의 대략 6분의 1에 해당하며 대영 제국과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 역사상 3번째로 큰 제국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1721년 11월에 선포된 이래로 1917년 3월에 해체될 때까지 북부 유라시아의 대부분에 걸쳐 있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영토 면적은 24,975,193km2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육지 면적의 대략 6분의 1에 해당하며 대영 제국과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 역사상 3번째로 큰 제국이었다. 또한 1799년에서 1867년 사이에는 북미에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897년에 유일하게 실시된 인구조사에서는 상당한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사회경제적 다양성을 가진 1억 2,560만 명의 인구가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부상은 경쟁자들인 스웨덴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카자르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청나라의 쇠퇴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 러시아는 보야르라는 귀족 계급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그보다 위에는 절대 군주인 차르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토대는 이반 3세(1462년~1505년)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는 몽골-타타르족의 지배에 대항하여 러시아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집권적인 러시아 국민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의 손자인 이반 4세(1533년~1584년)는 1547년에 전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가 되었다. 1550년부터 1700년 사이에 러시아 차르국은 연평균 35,000km2씩 팽창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으로는 류리크 왕조의 단절과 시베리아 정복, 그리고 표트르 대제의 즉위 등이 있다.
표트르 대제는 차르국을 제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수많은 전쟁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주요 유럽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모델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으며, 이는 제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현대적, 과학적, 합리주의적, 서구 지향적인 체제를 도입하는 문화 혁명을 이끌었다. 그뒤를 이은 예카테리나 대제는 정복, 식민화 및 외교를 통해 러시아 제국의 확장을 계속 추진했으며, 이전에 표트르가 추진했던 서구식 모델로의 현대화 정책을 이어갔다. 예카테리나의 후계자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야망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유럽 전역에서 세속주의와 자유주의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하여 신성 동맹을 구성했다. 러시아는 서쪽, 남쪽 및 동쪽으로 더 확장하여 유럽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거둔 전쟁에서의 승리는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저지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에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아시아로 확장함과 동시에 내부 체제를 개혁하였다. 크림 전쟁 이후 재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2,300만 명의 농노를 해방시키는 등 여러 개혁을 실시했지만, 1881년에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1721년부터 1762년까지 러시아 제국은 로마노프가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1762년부터 1917년까지는 독일 혈통의 모계 분파인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가가 통치했다. 19세기 초 러시아 영토는 북쪽의 북극해에서 남쪽의 흑해까지, 서쪽의 발트해에서 동쪽의 알래스카, 하와이 및 캘리포니아까지 확장되었다. 19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캅카스산맥과 중앙아시아 대부분 및 동북아시아의 일부를 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대한 영토와 더불어 유럽의 주요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은 20세기에 접어들자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891년의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하면서 이로 인해 민중들의 불만이 증대되었다. 한편 러시아 제국은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절대 군주제 국가였으므로, 대내적으로는 급속한 정치적 급진화와 함께 혁명적인 사상들이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05년의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는 국가 의회인 국가두마의 창설을 승인했지만, 여전히 자신은 절대적인 정치 권력을 유지했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편을 들어 참전했지만, 전투에서 계속해서 패배를 겪자 황제에 대한 러시아 민중의 반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마침내 1917년, 대규모 소요사태와 군대 내 반란이 2월 혁명을 촉발시켰고 이는 뒤이어 니콜라이 2세의 퇴위, 러시아 임시정부의 수립, 그리고 최초의 러시아 공화국 선포로 이어졌다. 그러나 러시아 공화국 내의 격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정부가 전쟁을 계속하자 공화정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 금방 식어버렸다. 때마침 1917년 7월에 여러 지역에서 식량부족에 따른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결국 러시아 공화국은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에 의해 전복되었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러시아 공화국 대신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겨우 빠져나왔으나, 왕당파를 비롯하여 여러 파벌들로 구성된 백군들은 이에 반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일으켰다. 볼셰비키는 내전 도중에 로마노프 왕가를 살해하면서 3세기 동안 지속된 로마노프 가문의 통치를 끝냈고, 점령지 내에서는 적색 테러를 비롯한 각종 정치적 탄압과 함께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1923년에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직후, 옛 러시아 제국 대부분의 영토에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건국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붕괴된 4대 제국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제국의 시초는 루스의 군소공국 가운데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타타르족이나 주변의 루스 공국들과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이반 3세 때 처음으로 스스로를 차르라고 자처했다.
차르는 러시아어로, 러시아 사회에서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 한해서만 사용되었던 칭호다.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모스크바의 대공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또한 모스크바에 있던 동방정교회의 주교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탄생하는 등, 러시아가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뒤를 잇는 제3의 로마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등 모스크바 대공국 내에서는 제국을 자부하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547년에는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가 자신을 전 러시아의 차르라고 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는 곧 전 러시아의 군주이며 로마 황제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칭호는 단지 국내용에만 머물렀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차르를 로마 황제는커녕 왕도 아닌, 단순히 모스크바 대공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반 4세가 죽은 후, 러시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동란 시대). 1606년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코사크, 스웨덴 등이 러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이 정점에 다다랐다. 1610년에는 당시 동유럽의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수도 모스크바가 점령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로마노프 왕조 등을 중심으로 국민군을 결성하여 외세에 대해 맹렬히 저항했다. 1612년, 10만에 이른 국민군 병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랫동안 혼란 상태였던 러시아는 그동안 유럽으로의 진출이 정체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로부터 국제적인 지위는 높지 않았다. 1613년, 류리크 왕조의 외척이자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원로원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으나, 아직 서구는 로마노프 왕조를 러시아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 대홍수 시대(Potop)로 불리는 내전에 개입하여 동구권에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지만,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큰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때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았다. 러시아의 경제 자체가 크게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억 4,000만 명이 살고 있던 러시아의 농촌은 서양의 농지들보다 한참 생산성이 낮았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노예 생활을 하던 코로프(10세기-12세기 루스의 계급 즉 홀로피)들을 농노로 만들었고, 이들을 세원으로 삼아 재정을 탄탄히 하고자 했다. 다만 이 코로프들은 여전히 19세기 후반까지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지역 계약 체제에 묶여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군사적으로도 확장을 꾀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군사적 원정을 벌인 후,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시 러시아는 여전히 북부 지역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되지 않던 상황이었는데, 이는 백해의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제외하고는 러시아 북부에 제대로 된 해양 기지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아르칸젤스크는 1년에 9개월 동안 얼어 사용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고, 발트 해로의 출입은 당시 스웨덴 제국에 의해 막힌 상황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이같은 상황을 끝내고자 했고,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덴마크와 연합을 맺어 대북방전쟁을 일으켜 스웨덴 제국을 공격했다. 대북방전쟁은 1721년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고, 스웨덴은 반강제적으로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대북방전쟁의 전리품으로 핀란드 만의 동남부에 위치한 4개의 지방들을 얻어냈고, 해상으로 통하는 길목을 열었다. 그곳에 그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수도였던 모스크바를 대체하기 위해 네바 강 인근에 새로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웠다. 이 천도 사업에는 러시아를 유럽에 포함시키려는 황제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도시 디자인들은 유럽 이탈리아 디자인들을 따랐다. 1722년,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가 통치하는 코카서스와 카스피 해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아스트라한을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본부로 삼았고, 1722년에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을 벌였다.
표트르 대제는 그의 정부 조직도 개편했다. 그는 옛 두마를 9명으로 이루어진 의회로 대체했고, 지방 정부도 재편하여 새로운 지방들과 주들로 나누었다. 표트르 대제는 의회의 역할이 세금을 제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강조했고, 그의 치세동안 러시아의 세입은 3배로 늘어났다. 또한 모든 종류의 자치 정부는 모조리 폐지되었고, 귀족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상대적으로 크게 강조되었다. 그는 정교회를 행정 시스템의 일부로 끌어들였는데, 이로서 종교를 국가의 하수인으로 삼았다. 그는 주교좌를 해산하고 시노드를 대신 설립하여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1725년에 죽었다. 그의 아내였던 예카테리나 1세의 짧은 통치 이후, 왕관은 안나 이브노브나 여제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개혁 정책의 속도를 늦추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의 오래된 숙적이었던 크림 칸국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러시아의 황위는 엘리자베타 여제에게 넘어갔다. 여제는 예술과 건축, 과학을 크게 지원했으며, 이때 처음으로 모스크바 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개혁적인 정책들을 실시 하지 않았으며, 20여 년에 가까운 통치 기간 동안 7년 전쟁의 승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공과가 없었다. 다만 이 승리도 군사적으로만 의미가 있었을 뿐, 정치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와 결혼한 독일의 공주였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은 이후,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했으며, 표트르 대제 때 크게 실추된 귀족들의 권위를 끌어올렸다. 귀족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말소되었으며, 그들에게 지방 자치권 등 엄청난 권력을 재부여하며 귀족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가 구시대적이라 하여 러시아풍 수염에 물리던 세금도 없애버렸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
출처: 러시아 제국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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