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900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독일어: Heinrich Luitpold Himmler, 듣기 , 1900년 10월 7일 ~ 1945년 5월 23일)는 친위대 국가지도자로서 친위대와 비밀경찰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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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Himmler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독일어: Heinrich Luitpold Himmler, 듣기 , 1900년 10월 7일 ~ 1945년 5월 23일)는 친위대 국가지도자로서 친위대와 비밀경찰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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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독일어: Heinrich Luitpold Himmler, 듣기 , 1900년 10월 7일 ~ 1945년 5월 23일)는 친위대 국가지도자로서 친위대와 비밀경찰을 지휘했다.
힘러는 홀로코스트의 실무를 주도한 최고 책임자였다. 나치 강제수용소와 학살대인 특수작전집단을 창설한 사람이자, 최종 지휘 책임자로서, 600만에서 12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산업적 규모로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연합군에 의해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자 자살하였다.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학교 교장인 아버지 게프하르트 힘러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안나 힘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게프하르트 루트비히 힘러, 남동생 에른스트 헤르만 힘러가 있었다.
힘러는 1918년 란트슈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사관 후보생으로 임명받아 11 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장교로 임관하기 전 전쟁이 끝난 탓에 힘러는 전투 경험 없이 제대했다.
힘러는 다음 해인 1919년에 뮌헨 기술학교에서 농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농업학 학위를 받았다. 힘러는 학생 시절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다. 자유군단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패배에 분개한 구독일군 출신이 구성한 우익계 사병 집단이었다. 힘러는 1920년 동거하던 매춘부 프리다 바그너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이웃 주민들은 두 사람이 자주 싸웠다고 했고, 힘러가 갑자기 종적을 감춤과 동시에 바그너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힘러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7월 4일 뮌헨에서 체포했다. 그러나 9월에 열린 재판에서 힘러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시기 힘러 행적은 분명하지 않은 게 많다. 그는 나중에 권력자가 되고서 초기 기록을 대부분 말살했다.
1921년 초 고향에 돌아온 힘러에게 부모는 양계장을 차려주면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힘러는 양계업을 하면서 동시에 "피와 대지와 검"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일 농민 계급의 혁신"을 주장하던 과격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 구호는 나중에 SS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비록 사업은 실패했지만, 이때 닭을 키우던 경험은 나중에 SS의 인종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힘러는 국기단(독일어: Reichkriegsflagge)에 가입했고, 1923년에 돌격대(독일어: Sturmabteilung)로 알려진 당의 새로운 준군사조직의 대원을 자유군단 출신들 중에서 충원하고 있던 NSDAP에 입당을 지원했다. 1923년 11월, 실패한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1923년 힘러는 제국국기단에서 상사가 되었다. 이 단체는 나치당이 혁명이라며 시도한 바이에른주 정부를 전복하려다가 실패한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이때 찍힌 사진 중에 힘러가 철조망 뒤에서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사진이 있다.
1923년과 1925년 사이에 나치당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당은 금지된 상태였다. 힘러는 그레고리 슈트라서의 비서를 하기도 했는데, 무능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그 자리를 요제프 괴벨스가 이었다. 1924년 말, 힘러는 히틀러가 석방된 것을 알았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강의 편지 내용은 자신이 히틀러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히틀러는 쿠테타 기도 실패 후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그런 내용의 편지를 받고 감동하여, 힘러를 뮌헨으로 초청했다. 1925년 3월 12일 히틀러를 방문한 힘러는 당원번호 1345의 당원증을 받았다. 엄격한 부친으로부터 다져진 복종하는 태도로 히틀러에게 일관한 힘러는 이후 항상 2인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히틀러의 충복이 되었다.
바트 라이헨할에서 살던 1926년 11월에 힘러는 마르가레테 보덴이란 여자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혼 경력이 있었으며, 힘러보다 7살이나 연상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1928년 8월 3일에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자식인 딸 구드룬이 1929년 8월 8일에 태어났다. 힘러는 구드룬을 인형(Püppi)이라 부르며 매우 예뻐했다. 그러나 마르가레테가 구드룬을 낳고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하자 아들을 입양하였지만, 힘러와 마르가레테의 결혼 생활은 험난했고 결국 1940년에 별거했다. 그때부터 힘러는 그의 비서였던 헤트비히 포타스트와 동거했다. 포타스트는 힘러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1942년 2월 15일에 태어난 아들 헬게와 1944년 7월 20일에 태어난 딸 나네테였다.
나치당은 힘러를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 돌격대 참모장 부관으로 임명했고, 상바이에른의 관구지도자(Gauleiter)의 대리인 겸 부지도자로서 일하게 되었다. 힘러는 1926년에 돌격대 중위(Sturmführer)로 임명되었고, 1927년 아직 돌격대의 하부 조직 중 하나에 불과했던 친위대(SS, Schutzstaffel)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27년, 힘러는 SS제국지도자 대리로 임명되어 실패한 양계업자가 SS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힘러는 1925년에 SS에 입대했고, 1927년에 SS제국지도자의 대리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그 임무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27년과 1929년 사이에, 힘러는 SS제국지도자 대리인 임무에 헌신했다. SS 지휘관 에어하르트 하이덴이 사임한 후, 힘러가 새로운 SS제국지도자로 1929년 1월에 임명되었다. 힘러가 SS를 이끌기 시작할 그 무렵, 총 대원수는 고작 280명에 불과했고, 형식적으로는 상급 조직인 돌격대 중에서 매우 미약한 조직의 하나였을 뿐이다. 힘러 자신도 SA상급지도자(SA-Oberführer)로 칭했다. 그러나, 1929년 이후 그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간단하게 "SS제국지도자"(Reichsführer-SS)라고만 언급하기 시작했다. 룀과 SA를 자신의 경쟁자로 간주하여 간섭에서 독립하려는 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힘러의 SS는 대원 수가 52,000명으로 늘어났고, 모든 대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아리안 지배 인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게 되었다.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 혈통 증명서가 그것이다. 이렇게 아무나 대원으로 받아들이던 SA와 차별화를 꾀하기 시작한 다음, SA집단지도자 힘러는 SS를 SA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3년 가을에 검은색 SS 제복을 도입하여 SA의 갈색 셔츠를 벗었다. 이것은 더 이상 SS가 SA의 하부 조직이 아닌 동급의 독립 조직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SS는 SA의 하부 조직이었고, 힘러도 수백명의 SA 간부 중 하나였다. 얼마 후, 힘러는 직역하면 SS상급집단지도자가 될 Obergruppenführer 겸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어 SA 부사령관과 동격으로 올라섰다.
1931년 룀이 돌격대의 지휘권을 인수하면서 힘러는 형식적으로는 룀의 부하가 되었다. 양적 팽창을 우선시한 룀에 비해 철저히 질적 팽창을 통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던 힘러는 점점 대립이 심해졌고, 이것이 힘러가 경찰 기관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는 동기가 되었다. 힘러의 경찰 장악은 배후에서 조종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직접 SS를 경찰 간부에 자신이 임명하여 국가 기관인 경찰을 자신의 개인 기관화하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뮌헨 경시총감에 취임한 힘러는 한 달 후에는 바이에른 주의 전 경찰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어 차례로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뤼벡, 튀링겐, 헤센,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경찰을 장악했고, 1934년 초에는 브레멘, 올덴부르크, 작센의 경찰을 장악했다. 남은 것은 프로이센뿐이었다. 이곳은 괴링이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있던 곳이다.SS-Oberführer.
힘러와 또 다른 히틀러의 오른팔이던 헤르만 괴링은 SA와 돌격대 사령관 에른스트 룀이 독일군 및 독일에서 나치 지배에 진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에 서로 동의했다. 힘러는 거기에 돌격대로부터 확실하게 독립하고 싶어했다. 룀은 강한 사회주의 관점을 갖고 있었고,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긴 했지만 아직 "진짜" 혁명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룀이 SA를 이용하여 쿠테타를 의도하고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룀을 제거하기로 합의했고, 게슈타포를 넘기라는 힘러의 요구를 괴링이 받아들였다. 히틀러가 힘러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괴링 자신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관련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깎인 것도 있었고, 경찰보다 독일 공군 창설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룀은 두 사람의 공동의 적이었다. 1934년 4월 20일, 괴링은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프로이센 경찰을 넘겨주었다.
힘러와 괴링의 설득으로, 히틀러는 룀이 쿠테타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룀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게슈타포는 룀을 끊임없이 감시하여 동태를 보고했으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S보안방첩부는 증거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히틀러는 룀 처형을 힘러와 괴링에게 맡겼고,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다루게, 발터 쉐렌베르크에게 "긴 장검의 밤"으로 알려질 1934년 6월 30일에 룀과 다른 주요 SA 간부들의 처형을 지시했다. 사건 다음날 힘러의 SS제국지도자 직함은 SS의 계급이 되었고, 한달 후인 7월 30일에 SS는 SA와 분리되어 나치당 내의 독립 조직이 되었다.
1936년, 힘러는 모든 정복 경찰을 새로운 질서경찰(Ordnungspolizei)로 통합하면서 더 많은 권한을 획득했다. 주요 간부는 힘러가 독일 경찰 수장의 직책을 수여받으면서 SS에서 차출되었다. 그렇지만 힘러는 정복 경찰 전체에 대하여 운영 통제권을 가질 수는 없었다. 전체 경찰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내무장관에 있었고, 힘러가 가진 실제 권한은 내무장관에게 사전에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1943년에가서야 힘러가 내무장관에 임명되면서 모든 행정 권한을 완전히 인수받았다. 독일의 정치 경찰에 대한 권력은 1934년에 힘러가 장악했고, 강제수용소뿐만 아니라 괴링으로부터 게슈타포도 인수받았다.
1943년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대중들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일자, 그런 비판을 잠재워야 할 게슈타포의 능력에 실망하기 시작한 당 기관들은 소위 " Politische Staffeln"이라 불린 정치 사찰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들은 실무 분야에서 명목상으로는 유일하게 게슈타포만 가졌어야 할 권한을 침해했다. 1936년 협정으로 힘러는 형사경찰(독일어: Kriminalpolizei, KIRPO)로 알려진 비정치적 문제를 담당하는 경찰 장관이 되었고, 그는 이 권한을 이용하여 KRIPO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지휘하는 보안경찰(독일어: Sicherheitspolizei, SIPO)과 합쳐서 독일 전체의 경찰권을 획득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통합은 실질적으로는 사문화되어 KRIPO는 여전히 민간인 분야를 담당하는 별개 조직으로 남아 있었고, 나중에 당 조직들이 세운 민간 행정 기구들에 병합되었다. 그렇지만, 제국 본토로 병합되지 않은 점령지에서는 KRIPO까지 통합된 조직이 대개 효과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힘러는 제국보안본부(독일어: 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를 조직했다. 이 조직에는 게슈타포, KRIPO와 SS보안방첩부가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각 관할 지역에서 KRIPO에 대해 RSHA에 지역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하여 전 KRIPO를 통제하고자 새로운 RSHA 체계를 사용하려던 1940년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다른 쪽에서 SS는 나중에 무장친위대로 발전하게 될 SS전투부대로 알려진 군사 분야를 키우고 있었다.
힘러는 SA시절 룀이 갖고 있던 시민군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부터 힘러는 SS를 정규군 못지않은 군사 조직으로 키우고자 했다. 괴링으로부터 게슈타포를 인수받고, 프로이센 주 경찰을 마지막으로 전국의 경찰을 장악한 이후 힘러는 본격적으로 군사 조직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에는 그 자신의 욕심도 있었고, 히틀러가 국방군을 100% 신뢰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지만, 돌격대(SA)의 전례를 잘 알고 있던 히틀러는 쉽게 힘러에게 그러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방군과 SS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여 SS가 무장전투부대 편성을 할 수 있도록 국방군이 양보하되
출처: 하인리히 힘러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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