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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German Empire
독일 제국(독일어: Deutsches Kaiserreich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제국이다. 독일 지역에서 근대 민족 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독일 통일의 결과로서 성립되어, 장기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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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독일어: Deutsches Kaiserreich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제국이다. 독일 지역에서 근대 민족 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독일 통일의 결과로서 성립되어, 장기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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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독일어: Deutsches Kaiserreich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제국이다. 독일 지역에서 근대 민족 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독일 통일의 결과로서 성립되어, 장기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제정이 붕괴하고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독일국(독일어: Deutsches Reich 도이체스 라이히[*])이라는 명칭은 이 때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독일에서도 쓰였다. 나치 독일의 영향으로 독일 제국을 제2제국(독일어: Zweites Reich 츠바이테스 라이히[*])이라 부르기도 한다.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주도하의 북독일연방이 승리하면서 독일의 통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 외곽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독일 제국이 출범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오스트리아 및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모든 독일계 국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호엔촐레른가의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프로이센 총리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 총리가 되었다.
독일 제국은 연방의 형태로서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3개의 자유시 및 "엘자스-로트링겐 제국령"(Reichsland Elsaß-Lothringen)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의 3/5를, 인구의 2/3을 차지하고 있었고 헌법상으로도 프로이센 국왕이 곧 독일 황제였기 때문에 연방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의 영향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1850년 이후로 독일 제국은 석탄, 철강, 화학, 철도 분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며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독일인들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업적들은 매우 대단했는데 전체 노벨상의 1/3이 이 시기의 독일인들에게 돌아갔을 정도였다. 47년 동안 독일 제국은 당대의 산업, 기술, 과학 강국이었고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세밀하고 긴 철도망, 세계 최강의 군대, 급성장하는 산업 기반으로 단숨에 유럽 대륙의 강대국으로 등극하였다.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총리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재임 초기에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더 보수적인 정책을 시도하였다. 그가 실시한 여러 개혁, 반 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 폴란드인의 독일 동화 정책 등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노령 연금, 상해 보험, 의료 보험, 실업 보험 등의 사회복지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유럽 복지국가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재임 후반기에, 독일 제국은 그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던 식민제국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쟁탈전에 참여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과 충돌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늘려나가려 애썼다. 이 시기에 독일은 남서아프리카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사임하고 새롭게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다. 열렬한 제국주의자였던 그는 공격적인 외교, 해외 식민지 획득, 건함 경쟁을 통해서 독일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애써 구축하고 유지해놓았던 유럽의 균형은 그의 후임 총리들과 빌헬름 2세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전까지 독일에게 유화적이었거나,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던 유럽 국가들도 점차 등을 돌렸다. 그러자 독일 제국은 같은 게르만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1879년에 동맹을 맺었고, 1882년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1914년 7월부터 유럽 정세가 급격하게 불안해지자, 이탈리아는 동맹을 파기했고 독일은 그 자리를 오스만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른 단기 결전만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 작전의 주요 골자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여 신속하게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론상으로는 동쪽의 러시아 제국이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프랑스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서부 전선은 참호전의 수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중에 러시아 제정이 붕괴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했다.
몇년 동안 전황은 교착 상태로 흘러갔지만,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점차 독일이 불리해졌다. 1917년 초 독일은 해상 봉쇄에 대응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했으나 이는 실패했고 오히려 미국이 참전하는 결과만 불러왔다. 1918년 10월, 독일의 마지막 노력이었던 춘계 공세도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가 항복하자 사기는 더더욱 떨어졌다. 결국 1918년 11월에 혁명이 일어나고 빌헬름 2세가 퇴위함에 따라 제정이 붕괴되었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 지불로 인해 일어난 초인플레이션과 미국발 대공황으로 인해 황폐해진 경제 상태, 그리고 패전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이 겪은 굴욕과 분노는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보수 엘리트들은, 프랑스 혁명이 촉발한 정치적ᆞ사회적 격변에 대한 반작용으로 혁명 이전의 구 체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른바 반동주의적 기조를 공유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1814~1815년 사이 파리 조약과 빈 회의 등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열강들은 소위 빈 체제라고 불리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806년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할 정치적 체제로서 독일 연방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독일 연방은 근대적 의미의 단일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 주권을 보유한 다수의 국가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연방에 불과하였고, 북독일의 프로이센 왕국과 남독일의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양대 세력 간의 경쟁 구도가 존재하였던 데다가, 바이에른 왕국이나 작센 왕국 등 다수의 독일계 국가들이 병존함에 따라 독일 지역에서는 정치적 분열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한편 1810년대 이후 유럽 전반에 확산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독일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33년 창설된 관세동맹(졸페라인)은 독일권의 경제적 통합을 촉진하며 정치적 통일에 대한 기대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에 자극받은 독일 내 개혁파들은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말미암아 전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의 일환으로서 1848년 독일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결성하여 헌법 제정과 통일 독일국가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혁명 세력 내부의 이해관계 불일치 및 갈등이 있었고, 기존 군주권력과 보수층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직면하여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다.
혁명의 좌절은 독일 통일문제의 주도권을 자유주의적 시민계층에서 보수주의적 융커계층으로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에서는 농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지지를 받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부상하였다. 그는 이념이나 원리원칙보다 국가이익과 권력정치를 중시하는 실용적인 정책(현실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채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적ᆞ외교적 역량을 기반으로 독일 통일을 실행하는 방안(소독일주의)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방안은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으로 인해 독일 연방은 1866년 해체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로이센 주도 하에서 마인강 이북의 22개 국가들이 연합한 북독일 연방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이 프랑스 제2제국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면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지 않았던 바덴 대공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등도 그해 11월 프로이센의 영향권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로써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독일계 국가들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되는데 성공했다. 파리를 점령한 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독일 황제'로 추대받는 형태로서 독일 제국의 출범을 선포하였다. 또한, 이 때에 오랜 세월동안 프랑스와 영유권을 두고 다투었던 엘자스-로트링겐 지방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획득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의 보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서구 열강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 프랑스를 고립화시키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1873년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3제국간 동맹(삼제 동맹)을 맺었다. 후에 러시아 제국은 이 동맹 체제에서 이탈하였다. 이어 1879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방위 동맹을 체결했다. 1882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간에 삼국 동맹을 결성했다. 1887년에는 발칸반도와 관련하여 러시아 제국의 재보장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영국과는 별다른 대립이 없었고, 이미 홀로 충분히 국력이 강성했던 영국은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체제의 외교로 고립됐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지만, 재위 6개월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이어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빌헬름 2세가 즉위하는데, 이를 "3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여 1890년에 그를 은퇴시킨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마자 친정을 실시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추진했던 외교정책과는 달리 대외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오스만 제국과 '바그다드 철도 부설조약'을 맺어 베를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 정책"이라는 제국주의적인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팽창정책은 유럽 국가들을 긴장시켜 러시아제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았으며, 영불협상을 맺어 러시아 제국-영국-프랑스를 주축으로 '삼국 협상'을 맺어 독일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영국은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캘커타를 연결하는 "3C 정책"을 내세웠는데, 서아시아에서 독일제국과 충돌하여 대립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판도는 신흥 강국인 독일 제국을 필두로 동맹국 세력과 기존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제국을 중심으로하는 협상국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1906년과 1911년에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지배권을 확보하여 영향권을 행사하려 하자, 독일제국은 모로코에 2차례 걸쳐서 개입하여 프랑스와 충돌(모로코 사건)하기도 했다. 또한,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여 영구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범게르만주의와의 대립 등으로 발칸반도에서 문제가 확산되면서 더욱더 심화되어갔다.
팽창정책에 의해 독일은 삼국 협상 구성 국가와의 외교적 마찰과 경제적인 부담을 안았고, 양상이 점점 심화됨에 따라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가던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발칸반도에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 지원을 선언한 뒤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제국은 러시아 제국, 프랑스, 벨기에, 대영제국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짧은 시간내에 전쟁이 끝날것이라는 예상했지만, 프랑스의 예상의외에 격렬한 저항과 마
출처: 독일 제국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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