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CERN
유럽 입자 물리학 연구소(-粒子物理學硏究所, 프랑스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는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사이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입자 물리학 연구소이다. 원래 명칭은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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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입자 물리학 연구소(-粒子物理學硏究所, 프랑스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는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사이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입자 물리학 연구소이다. 원래 명칭은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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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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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입자 물리학 연구소(-粒子物理學硏究所, 프랑스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는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사이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입자 물리학 연구소이다. 원래 명칭은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였고, 이를 따라서 CERN(IPA 발음: 프랑스어 [sɛʀn], 영어 [sɝn])으로 불린다.
유럽 입자 물리학 연구소(-粒子物理學硏究所, 프랑스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는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사이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입자 물리학 연구소이다. 원래 명칭은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였고, 이를 따라서 CERN(IPA 발음: 프랑스어 [sɛʀn], 영어 [sɝn])으로 불린다.
CERN은 설립 초기부터 입자 가속기 등을 이용해, 고 에너지 물리학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물리학자들의 문헌 검색 및 제휴를 위하여 고안된 HTML과 월드 와이드 웹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CERN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 공작의 의견으로부터 1949년 12월 프랑스 원자력 고등 위원회의 자문의원이었던 드 브로이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여러 참가국 개개의 상황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학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실험실 또는 연구소가 생기면, 국가적인 시설 이상의 자원에 힘입어 규모와 비용 면에서 개별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1951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 연구소를 설립하는 평의회 설립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두 달 후 11개 국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핵 연구를 위한 유럽 평의회)의 설립 동의안에 서명해 평의회와 CERN이란 이름이 탄생한다.
1953년 7월에 생긴 CERN 협의회에서 12개 창립국의 승인을 받게 되고, 1954년 9월 29일 마침내 연구소는 Organisation Européenne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유럽 핵 연구 조직)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하고, 평의회는 해산되었고, CERN이란 이름은 계속 남아서 연구소의 이름이 된다.
한편 연구소의 부지는 1952년 10월 평의회에서 스위스의 제네바로 결정되었고, 1953년 6월 제네바 캉통의 투표에서 최종적으로 비준되었다. 1954년 5월 17일 연구소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CERN은 유럽 20개의 회원국에 의해 운영되고, 비 유럽 국가들도 여러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회원국은 자본금과 CERN 프로그램의 운영비를 분담하고, 평의회에 참석할 권리를 가진다. 회원국이 될 수 없거나, 자격이 없는 국가 또는 국제 기구들은 참관국이 될 수 있다. 참관국은 평의회에 참관하고 문서를 열람할 수 있지만, 결정 과정에는 참여할 수 없다.
CERN에는 약 2,500명이 상시적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세계 85개국의 580여 대학과 연구소에서 약 8,000명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러 CERN을 방문하고, 이용하고 있다.
싱크로사이클로트론(SC)과 교차 저장 링(ISR)은 현재 가동 중지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LHC를 비롯한 나머지 가속기와 충돌기는 여전히 CERN의 입자 물리학 및 핵 물리학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
환율: 1 CHF = 0,829 EUR (2011년 9월 19일 기준)
CERN은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월드 와이드 웹(WWW)의 발명이 바로 그것이다. CERN의 여러 컴퓨터에서 얻은 방대한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주고받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던 웹은 1989년 팀 버너스 리가 기획하였다. 그의 계획은 1980년 그가 CERN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계획했던 프로그램이었으며, 인콰이어(ENQUIRE)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해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한 인터넷을 도입하려 했지만, 그의 기획은 채택되지 않았다. 리는 다음 해 1990년 벨기에의 컴퓨터 공학자 로버트 카죠의 도움을 받아 프로젝트를 다시 발전시켰다. 그는 NeXT사의 컴퓨터에서 직접 웹 코드를 작성하였고, 그 해 12월에는 첫 번째 웹 사이트가 탄생하였다. 1994년 4월 30일 그는 웹을 전 세계 어느 사람이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쓸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허가를 CERN으로부터 받아내었다.
CERN은 후에 LHC 프로젝트의 시작과 함께 웹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손을 떼었다.
최근에는 네트워크상에 있는 수많은 컴퓨터들의 자원을 동시에 이용하여 단일 문제를 풀기 위한 기술인 그리드 컴퓨팅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CERN은 그리드 컴퓨팅 기술을 이용한 EGEE(Enabling Grids for E-sciencE) 프로젝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LHC에서부터 얻은 엄청난 양의 테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되는 LHC Computing Grid와 스위스의 두 개의 IXP(Internet Exchange Points) 중 하나인 CIXP(CERN Internet Exchange Point)에도 연관되어 있다.
가가멜 프로젝트는 전기적으로 중성인 약한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중성류의 증거를 발견하기 위해 발족한 프로젝트이다.
전자기적인 상호 작용으로 상대적으로 작은 중성류의 효과가 검출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기 상호 작용을 하지 않는 중성미자를 이용하여 중성류의 효과만을 볼 수 있는 실험을 설계하여야 했다. 1963년 시에나 컨퍼런스 직후 많은 양의 중성미자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중성미자 실험이 계획되었고, 195년 CERN과 프랑스 원자력 위원회사이에 이루어진 협약을 바탕으로 1965년 12월 가가멜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대형 거품상자의 제작이 계획되었다. 가가멜이라는 이름은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에 나오는 거인 족의 이름에서 따왔다.
가가멜 거품 상자는 프랑스의 새클레이(Saclay) 실험실에서 제작되었다. 가가멜은 지름 1.8미터, 길이 4.8미터, 무게 1,000톤이 넘는 원통 속에 18톤의 액체 프레온을 채워 넣었고, 1970년 PS의 중성미자 빔이 나오는 CERN의 남동쪽 지역에 설치되었다. 가가멜의 중성류 연구는 1972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뮤온 중성미자가 중성류를 통해 원자 내부 전자와 탄성 충돌하고, 이 결과로 튀어나온 전자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1972년 9월부터 1973년 3월 사이에 일어났으며, 충분한 검토 후, 중성류의 발견은 거의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HPWF 그룹에서 추가적인 분석 결과 신호가 사라졌다고 발표하면서 가가멜 프로젝트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가가멜 그룹의 멤버들은 쏟아지는 질문에 잘 버텨나갔다. 1년 후 1974년 6월 런던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는 가가멜 그룹이 이전의 두 배의 데이터를 가지고 발표하였고, HPWF 그룹도 자신들의 실수를 설명하였으며, 페르미 연구소와 아르곤 국립 연구소의 추가적 확인으로 중성류의 존재가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CERN이 세운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꼽히는 것은 W와 Z보존을 발견한 것이다. W 보존과 Z 보존의 발견은 원자핵 사이의 약한 상호작용을 매개 되는 입자를 찾기 위한 시도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1930년대 중반 페르미가 원자핵의 베타 붕괴로부터 상호 작용의 패턴을 읽어내었고, 뮤온의 붕괴, 파이온의 붕괴 등의 현상도 페르미의 이론으로 잘 설명되는 것이 확인되면서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 작용이 다른 상호 작용임이 명백해졌었다. 이후에도 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고, 머리 겔만, 리처드 파인만, 셸던 리 글래쇼, 피터 힉스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약한 상호 작용에 관련된 연구 결과들을 제시되고 있었다. 1967년에는 이 모든 것을 정교하게 짜 넣어 W 보존과 Z 보존으로 매개 되는 약한 상호 작용과 질량이 없는 광자를 통해 매개되는 전자기 상호 작용을 함께 기술하는 스티븐 와인버그의 논문 <렙톤의 모형>이 발표되었다.
당시까지 W 보존과 Z 보존의 발견을 위해 사용되던 CERN의 가속기는 SPS였다. SPS를 이용하여 400GeV에 이르는 양성자 빔을 생성하고, 이를 바깥으로 뽑아낼 수 있는 데까지는 처음 설계안이 올라갔던 1964년으로부터 10년 이상이 걸렸고, 이를 위해 투자된 비용도 1970년 당시 기준으로 11억 5,000만 스위스프랑에 달하였다. 하지만, 와인버그의 논문뿐 아니라, 1969년 양성자 안의 쿼크의 존재가 발견되고, 1971년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가 증명되고, 게이지 이론이 떠올랐으며, 1973년 양-밀스 이론의 점근 자유성이 증명되었고 1974년 새로운 쿼크의 존재를 의미하는 중간자의 발견, 1975년 타우온 1977년 바닥 쿼크의 발견으로, W 보존과 Z 보존의 발견을 위해서는 SPS와 다른 방식의 새로운 가속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하였다.
반면, 중성미자-핵자 충돌 실험, 전자와 양전자가 30~40GeV의 에너지로 충돌하는 SLAC의 PETRA 실험, 1970년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사이에 얻은 뮤온 쌍이 생성되는 과정의 전방-후방 비대칭성 데이터로부터 W와 Z 보존의 질량이 50GeV와 100GeV 사이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또한 와인버그 각의 정밀한 측정을 통하여 W 보존과 Z 보존의 질량이 각각 약 80, 90GeV라고 예측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가속기는 이 정도 질량의 입자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까지 입자를 가속할 수 있어야 했고, 이에 따라 전자-양전자 충돌을 만들어내는 LEP와 SPS를 양성자-반양성자 충돌기로 개조해야 한다는 두 개의 안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시간적인 압박과 기술적인 문제로 인하여 LE
출처: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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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멤버 이스라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