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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Nazi Germany
나치 독일, 공식 명칭으로 독일국 또는 대독일국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통제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이다. 이 국가를 지칭하는 또다른 명칭인 제3제국은 나치가 자신들을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과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면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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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공식 명칭으로 독일국 또는 대독일국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통제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이다. 이 국가를 지칭하는 또다른 명칭인 제3제국은 나치가 자신들을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과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면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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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공식 명칭으로 독일국 또는 대독일국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통제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이다. 이 국가를 지칭하는 또다른 명칭인 제3제국은 나치가 자신들을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과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면서 사용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며 수립된 나치 독일은 스스로를 천년 제국이라고도 지칭했지만, 불과 12년 뒤 연합군이 베를린에 입성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종전된 1945년 5월 국가가 해체되었다.
1933년 1월 30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 이후, 나치당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이후, 히틀러는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하여 퓌러라는 직위를 만들고 국민투표를 통해 취임했다. 이로써 독일의 권력은 히틀러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그의 말은 곧 법이 되었고, 정부는 조정하고 협력하는 기구가 아니라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여러 세력의 모임으로 변질되었다. 대공황 시기 나치는 막대한 군사 지출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회복하고 대규모 실업 위기를 종식시켰으며, 적자 지출을 감당하면서까지 아우토반 개발 등 사회 기반시설 개발에 더불어 국방군 강화를 포함하는 재군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러한 나치의 정책으로 독일의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히틀러 정권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이후 나치 정권은 영토 확장을 위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시행했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무시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협박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합병했다. 이후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켰다. 1940년까지 독일은 이탈리아 등의 추축국 동맹국들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점령하고 영국을 위협했다.
인종주의, 우생학, 반슬라브주의, 이 중에서 특히 반유대주의는 나치 독일의 핵심적 이념 중 하나였다. 나치는 게르만족을 아리아 인종의 가장 순수한 분파인 "우월 인종"이라고 주장했으며, 유대인, 롬인, 슬라브족, 동성애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 외의 정치적 반대파, 여호와의 증인, 프리메이슨, 강제 노동을 거부한 사람 등 매우 광범위한 각종 분야의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투옥 혹은 추방되거나, 심한 경우 살해되었다. 히틀러의 통치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과 기독교도들은 억압받았고 지도자들은 투옥되었다. 나치 시기에 교육은 과학적 인종주의, 인구 정책, 군 복무 적합성에 집중했으며, 여성의 직업과 교육의 기회는 축소되었다. 나치의 선전부는 반유대주의적 "거짓 선동"을 퍼뜨렸으며,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여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개인 숭배를 조장했다. 정부는 예술적 표현을 통제하여 특정 예술 형식을 장려하고 그 외의 예술 활동은 금지하거나 억압했다. 대량 학살, 대량 살인, 강제 노동 등이 나치 독일의 주요한 정책 중 하나였으며 이러한 인종 정책의 실행은 홀로코스트로 절정에 달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하여 초기에 성공을 거둔 이후, 동유럽에서 인종 청소를 위해 게네랄플란 오스트, 굶주림 계획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반격과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1943년부터 독일은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고 1944년 말까지 이르러 독일 본토까지 후퇴했으며, 독일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확대되고 추축국은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독일 동부는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서쪽은 서방 연합국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항복을 결정하지 않던 히틀러가 4월 30일 사망하자, 결국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항복 이후 연합국은 탈나치화 정책을 전 유럽에서 시행했으며, 살아남은 나치 지도층 중 대부분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전쟁 범죄로 기소하여 처벌했다.
나치당 집권 시기의 독일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는 "나치 독일"과 "제3제국"이며, "천년 제국"(Tausendjähriges Reich)이라는 용어도 종종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 중에서 "제3제국"이라는 단어는 이후 나치의 선전에 활용된 아서 모엘러 반 덴 브룩의 1923년 출판된 《제3제국》(Das Dritte Reich)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책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을 "제1제국"으로,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을 "제2제국"으로 분류하여 나치 독일이 이들의 뒤를 이은 "제3제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 독일의 경제에 심각한 침체가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침체의 이유 중 하나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해 많은 돈을 찍어냈지만,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화폐 가치가 떨어졌으며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고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폭동이 빈번해졌다. 독일 정부가 1923년 1월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의 산업 지역을 점령했고, 독일 내에서도 광범위한 반란이 일어났다.
"나치당"이라는 단어로 흔히 알려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은 1919년 만들어진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의 후신 정당으로 1920년 창당했으며,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여러 극우 정당 중 하나였다. 나치당의 강령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베르사유 조약의 거부, 급진적 반유대주의와 반볼셰비즘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 게르만족을 위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직역: '생활권')의 확대, 인종에 기반한 국가 공동체의 형성,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을 포함한 적극적인 탄압을 통한 인종 청소를 주장했다. 나치당은 푈키셰 운동(Völkische Bewegung)에 기반한 국가적, 문화적 쇄신을 제안했으며, 나치의 준군사조직이었던 돌격대(Sturmabteilung), 또는 갈색 셔츠단은 정치적 입장을 확대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경쟁 집단의 회의를 방해하고 거리에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 또는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극우 무장 단체는 당시 바이에른 지역에서 흔했으며, 구스타프 리터 폰 카어의 극우 세력에 호의적이었던 주정부에게 별다른 제지 없이 용인되었다.
1929년 미국 주식 시장의 대폭락이 발생했을 때, 독일의 경제에 미친 영향은 참혹했다. 수백만의 독일인이 일자리를 잃고 주요 은행이 붕괴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러한 비상사태를 이용해 지지를 확보하려고 준비했으며, 경제를 강화하고 일자리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많은 유권자들은 나치당이 질서를 회복하고, 내전을 진압하며, 독일의 국제적 평판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32년 7월 국가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차지하여 국가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다.
나치당은 1932년 두 차례의 국가의회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이 상황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지도자가 되지 않는 한 연립 정부 참여를 거부했다. 결국 경제계의 기업가, 산업가들과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했으며, 이 사건은 "마흐테르그라이풍"(Machtergreifung, 권력 장악)이라는 단어로 잘 알려져 있다.
1933년 2월 27일 밤, 국가의회 의사당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나치당의 주장에 따라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반 데르 루브가 화재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히틀러는 이러한 방화가 공산주의 봉기의 시작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1933년 2월 28일 〈국가의회 화재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집회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시민의 자유가 박탈되었으며, 경찰의 기소 없이 사람들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 법안은 나치당의 선전 캠페인 속에 통과되었으며 캠페인은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나치당의 돌격대는 전국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했고 독일 공산당원 4천 명을 체포했다.
1933년 3월 23일, 바이마르 헌법을 개정한 〈전권 위임법〉이 국가의회에서 찬성 444표 대 반대 94표로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히틀러와 그의 정부가 대통령이나 의회의 동의 없이도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법안의 통과는 3분의 2 이상의 의원들의 찬성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나치당은 협박과 국가의회 화재법의 조항을 사용하여 공산당 소속 의원들의 출입은 완전히 금지했으며 여러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참석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법안의 통과 이후, 〈전권 위임법〉은 나치당과 히틀러가 수립한 독재 정권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5월 10일 정부는 사회민주당의 자산을 압류했고 6월 22일 당을 불법 정당으로 선언했다. 6월 21일 돌격대는 이전의 연정 파트너였던 국가인민당의 사무실을 급습했으며, 6월 29일 당은 해산되었다. 나머지 주요 정당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해산되었다. 최종적으로 1933년 7월 14일, 〈정당 결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독일은 일당제 국가가 되었고, 나치당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당이 되었다. 법률은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금지했고, 아직 해체되지 않은 모든 정당을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1933년, 1936년, 1938년에 실시된 이후의 선거들은 나치당의 통제를 받았으며, 나치당원과 소수의 무소속 의원만이 선출될 수 있었다.
모든 시민 단체의 지도부는 나치당의 동조자나 당원으로 대체되었고, 나치당의 휘하로 합병되거나 해체되었다. 나치 정권은 1933년 5월 1일을 "전국 노동의 날"로 선포하고 많은 노동조합 대표들을 베를린으로 초대하여 축하 행사를 열었다. 그 다음 날, 돌격대가 전국의 노동조합 사무실을 급습하여 파괴하였고, 모든 노동조합은 해체되었으며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 〈전문 공무원 복직을 위한 법률〉은 유대인이거나 나치당에 대한 헌신이 의심스러운 모든 교사, 교수, 판사, 치안판사, 공무원을 직장에서 해고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이로써 나치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비정치적 기관은 교회뿐이었다.
나치당은 흑적금 삼색기를 포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상징을 폐지하고 재작업된 상징을 채택했다. 이전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가 독일의 두 공식 국기 중 하나로써 복원되었지만, 이후 1935년 9월 하켄크로이츠 국기가 유일한 독일의 국기가 되었다. 또한 나치당의 노래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가 독일의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600만 명이 실업 상태였고 무역의 적자 수지가 엄청나서 경제 상황이 심각했다. 정부가 적자 지출을 감수하면서 1934년부터 공공 사업 프로젝트를 시행하여 같은 해 말까지 170만 개가 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고, 평균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돌격대의 지도부는 더 큰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원했으며 점점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응하여 히틀러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과 게슈타포(Gestapo)를 활용하여 돌격대 지도부 전체를 숙청했다. 히틀러는 돌격대 참모장(Stabschef)인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돌격대 지도부와,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정치적 반대파를 함께 체포하여 총살시켰다. 나중에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고 불리게 된 사건으로 인해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대 200명의 돌격대 지도자들과 정치적 반대파 정치인들이 사망했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사망했다. 이전에 나치당은 〈독일국의 국가원수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 법률에 따라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국가의 대통령 직책이 폐지되고 그 권한이 총리와 합쳐져야만 했다. 이 법률로 히틀러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지도자 겸 국가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이라고 명명되었지만 결국 총리 직위는 폐지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히틀러를
출처: 나치 독일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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