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936
버디 홀리
Buddy Holly
찰스 하딘 홀리(영어: Charles Hardin Holley, 1936년 9월 7일 ~ 1959년 2월 3일)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이다. 1950년대 로큰롤의 중심인물이자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서 예명은 버디 홀리(영어: Buddy Holly). 대공황 와중에 텍사스주 러벅의 음악적 배경이 있는 가족 슬하에서…
인물1936
Buddy Holly
찰스 하딘 홀리(영어: Charles Hardin Holley, 1936년 9월 7일 ~ 1959년 2월 3일)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이다. 1950년대 로큰롤의 중심인물이자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서 예명은 버디 홀리(영어: Buddy Holly). 대공황 와중에 텍사스주 러벅의 음악적 배경이 있는 가족 슬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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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디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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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하딘 홀리(영어: Charles Hardin Holley, 1936년 9월 7일 ~ 1959년 2월 3일)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이다. 1950년대 로큰롤의 중심인물이자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서 예명은 버디 홀리(영어: Buddy Holly).
찰스 하딘 홀리(영어: Charles Hardin Holley, 1936년 9월 7일 ~ 1959년 2월 3일)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이다. 1950년대 로큰롤의 중심인물이자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서 예명은 버디 홀리(영어: Buddy Holly). 대공황 와중에 텍사스주 러벅의 음악적 배경이 있는 가족 슬하에서 자라났으며, 기타 치는 법을 배우고 형제자매와 합창하기를 즐겼다. 복음성가, 컨트리 음악,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인들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러벅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공연을 펼쳤다.
1952년 현지 텔레비전 방송에서 첫 출연한다. 이듬해 자신의 벗 밥 몽고메리와 그룹 '버디 앤드 밥'을 결성하여 활동한다. 1955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오프닝을 열어준 이후부터 음악 커리어를 추구해나가기로 굳게 다짐한다. 홀리의 밴드는 컨트리 앤 웨스턴 음악에서 로큰롤으로 전향해버렸다. 그해 10월 빌 헤일리 & 히즈 코메츠의 오프닝을 열었을 때 내슈빌의 스카우터 에디 크랜달에게 발탁되었고 그는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도록 해주었다.
데카에서의 홀리의 녹음 세션은 오웬 브래들리의 프로듀싱 하에 이루어졌는데 홀리는 브래들리의 음악 스타일과 스튜디오에 대한 통제를 고깝게 보았다. 그리하여 홀리는 뉴멕시코 클로비스에 사는 프로듀서 노먼 페티에게 가서 〈That'll Be the Day〉 및 기타 여러 곡의 데모를 제작하였다. 페티는 홀리 밴드의 매니저를 도맡고 브룬스윅 레코드에 데모를 보내는 일까지 처리했다. 음반사에서는 이것을 '더 크리케츠' 명의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홀리의 밴드명으로 정착되었다. 1957년 9월 크리케츠가 투어를 도는 와중에 〈That'll Be the Day〉가 미영 싱글 차트에서 1위를 달성했다. 또 10월에는 〈Peggy Sue〉가 대히트를 기록함으로써 성공이 꼬리를 물었다.
1957년 11월 《The "Chirping" Crickets》가 발표되었으며 영국 앨범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한다. 1958년 1월 《에드 설리번 쇼》에서 두 번째 출연을 이루었으며 호주와 영국을 도는 투어를 개시하였다. 1959년 초 크리케츠를 떠나 새로운 밴드를 조직하는데 훗날의 스타 웨일런 제닝스, 이름높은 세션 뮤지션 토미 올섭, 칼 번치로 구성되었으며 미국 중서부를 중심으로 투어에 착수하였다.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에 있었던 공연 이후 홀리는 비행기를 대절하여 미네소타주 무어헤드로 향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한 직후 비행기는 추락했으며 홀리와 동승한 리치 밸런스, 더 빅 보퍼, 조종사 로저 피터슨은 모두 사망했다. 이 비극적 사고는 후일 돈 매클레인의 노래 〈American Pie〉에서 음악이 죽은 날로 묘사된다.
짧디짧은 커리어 와중에도 홀리는 자신이 곡을 직접 쓰고 직접 녹음했다. 두 대의 기타, 각각 한 대의 베이스, 드럼 구성이라는 전통적인 로큰롤 라인업을 정립시킨 음악인으로도 평가된다. 밥 딜런, 비틀즈, 롤링 스톤스, 에릭 클랩튼, 홀리스(회명 자체가 홀리를 기리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엘비스 코스텔로, 데이브 에드먼즈, 마샬 크랜쇼, 엘튼 존 등 후대의 아티스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 1986년 《롤링 스톤》 선록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인'에서 13위.
1936년 9월 7일, 찰스 하딘 홀리는 텍사스주 러벅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로렌스 오델 "L.O." 홀리(Lawrence Odell "L.O." Holley), 모친은 엘라 폴라인 드레이크(Ella Pauline Drake)이며, 형제자매로 래리, 트레비스, 패트리시아 로가 있었다. 홀리는 조계는 대개 영국인과 웨일스인으로 이뤄져 있으되, 아메리카 원주민의 혈통이 다소 있음이 확인되었다. 어려서 그의 별칭은 "친구(buddy)"였다. 홀리가 태어나던 무렵은 대공황이 활개치던 시절인지라 홀리 가족은 러벅 시내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다. 아버지도 직장을 자주 갈아치우는 형편이었다.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가족 전원이 태버내클 침례교회 소속이었다.
홀리 가정은 대단히 음악과 관계가 깊다. 아버지를 제외한 전 가족이 노래나 연주을 할 줄 알았으며, 형들은 장기자랑 대회에서 많이 공연한 바 있었다. 한번은 홀리도 바이올린을 들고 참여했는데, 홀리가 바이올린 연주에 대해선 까막눈인지라 형 래리가 미리 현에다 기름칠을 해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게 해놨다. 그리하여 형들은 장기자랑에서 우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래리와 트래비스가 군에 불려가 복무하게 되었다. 래리가 제대하여 돌아올 때 태평양에서 파병되었을 때 선원한테서 구입한 기타 한 대를 들고왔다. 홀리가 11살일 때 피아노 수업을 듣게 되었으나, 단 9개월 듣고 나서 작파해버렸다. 그 사연인즉 홀리가 학교 버스에서 급우가 노래를 부르며 연주하던 기타 소리를 듣고, 기타로 관심을 돌려버린 것이다. 일단은 스틸 기타를 사준 부모였지만, 형이 쓴 것 같은 기타를 조른지라 전당포에서 원하던 기타를 사줬고, 트래비스가 기타 치는 법을 알려주었다.
어린 시절의 홀리가 영향으로 삼은 음악인들은 행크 윌리엄스, 지미 로저스, 행크 스노, 밥 윌스, 카터 패밀리 등이었다. 로스코 윌슨 초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밥 몽고메리란 아이와 친구가 되어 짝지어 연주를 같이 하거나, 루빈 브라더스나 조니 & 잭의 곡들을 따라해 보기도 했다. 두 명 모두 WSM의 《그랜드 올 오프리》, KWKH의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 《빅 D 잼보리》를 애청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소니 커티스란 아이와 제리 앨리슨이란 아이와 만나 함께 연주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1952년 홀리와 잭 닐이 짝을 지어 "버디 앤 잭"을 조직하고, 장기자랑 대회나 시내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닐이 탈퇴한 뒤에는 밥 몽고메리가 대신해서 들어갔으므로 "버디 앤 밥"이 되었다. 1953년부터는 KDAV의 《선데이 파티》에서 공연하게 되었고, 러벅 시내의 많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행했다. 이 시절 홀리가 큰 영향으로 삼은 것은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를 틀어주던 심야 라디오 방송이었다. 차 안에서 커티스와 앉아 러벅 시내의 전파가 멎어드는, 밤에야 착신이 가능할 정도로 멀찍한 방송국에서 틀어주던 음악들에 귀기울이곤 했던 것이다. 이러면서 홀리는 차차 먼젓번에 들어 왔던 컨트리, 웨스턴에서 받은 영향과, 지금에 와서 들어온 R&B의 영향을 뒤섞기 시작했다.
1955년 러벅 고등학교를 졸업한 홀리는 완전히 음악계에 투신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더욱이 KDAV의 패피 데이브 스톤이 주선한 러벅에서 이뤄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본 뒤로 그 결심은 더한층 굳어졌다. 동년 2월 홀리는 페어 파크 대공연장에서 열린 프레슬리의 공연의 오프닝을 열어주었다. 게다가 엘비스의 4월 코튼 클럽 공연 및 6월 그곳에서의 재공연에서도 오프닝을 맡아주었다. 이즈막 홀리는 스탠드업 베이스에 래리 웰본, 드럼에 앨리슨을 둔 밴드를 꾸렸고, 그 음악성은 컨트리 앤 웨스턴에서 프레슬리의 공연, 음악에 심취했던지라 로큰롤로 전향되어 있었다. 금년 10월 스톤이 빌 헤일리 & 히즈 코메츠의 공연을 주선, 홀리를 오프닝 공연자로 세워주었다. 바로 이 공연에서 홀리는 내슈빌의 스카우터 에디 그랜달의 눈에 띄었다. 홀리의 공연에 마음이 움직인 크랜달은 그랜드 올 오프리의 매니저 지 데니에게 기별하여 홀리와의 취입 계약을 주비할 것을 일렀다. 스톤이 건네준 데모 테이프를 데니가 받아 다시 폴 코헨한테 건내어 1956년 2월 비로소 홀리의 밴드는 코헨의 인가를 받아 데카 레코드에 들어간다. 계약과정에서 데카 측이 실수로 홀리(Holley)의 성을 "Holly"로 와기했는데, 그 바람에 일반에서 홀리는 "버디 홀리(Buddy Holly)"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져버렸다.
1956년 1월 26일, 홀리는 직업삼아 하는 녹음으로는 처음하는 녹음을 행했다. 프로듀서는 오웬 브래들리였다. 연후 내슈빌에서 두 번 더 녹음을 행한 홀리였으나, 프로듀서가 일임하여 세션 음악인 및 편곡을 좌우한 터라 홀리는 창작권의 결여에 대하여 점점 못마땅함을 느끼게 되었다. 1956년 4월 데카에서 전면에 〈Blue Days, Black Nights〉, 이면에 〈Love Me〉를 실은 싱글을 출반한다. 데카는 파론 영의 오프닝 공연에 홀리를 배정시켰다. 이 투어의 와중에 홀리의 밴드는 "버디 홀리 앤 더 투 톤즈(Buddy Holly and the Two Tones)"로 광고되었으며, 이다음 광고할 때는 "버디 홀리 앤 더 스리 톤즈(Buddy Holly and the Three Tunes)"가 되어 있었다. 이후 홀리의 차기작 〈Modern Don Juan〉이 〈You Are My One Desire〉을 이면에 싣고 출반되었다. 어느 곡도 파장을 불러 일으켰음직한 것은 없었다. 1957년 1월 22일 데카는 홀리에게 계약연장은 없을 것임을, 아울러 다음 5년간 본 음반사에서 출반한 곡은 타 음반사에서 출반해선 안 된다는 통보를 했다.
데카에 있으면서 홀리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러던 중 홀리는 버디 녹스의 〈Party Doll〉과 지미 보웬의 〈I'm Stickin' with You〉의 성공에 마음이 움직여 이 곡들의 프로듀싱을 맡은 노먼 페티를 심방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앨리슨, 베이시스트 조 B. 몰딘, 리듬 기타리스트 니키 설리번을 대동하여 홀리는 뉴멕시코주 클로비스에 자리한 페티의 녹음실에 갔다. 이곳에서 홀리 일행은 먼저 내슈빌에서 녹음을 한 바 있던 〈That'll Be the Day〉의 데모를 제작했다. 홀리는 원망하던 리드 기타 파트를 자기가 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던 소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페티는 홀리의 매니저까지 맡아주어 뉴욕 시 소재의 브룬스윅 레코드에 이 데모를 전송했다. 홀리는 이미 데카 레코드와의 계약에 발목을 잡힌 터라, 자기자신의 명의 대신에 회명을 지어 그 명의로 삼기로 했다. 이에 회명을 궁리하던 중, 앨리슨이 생각해낸 "크리케츠(Crickets)"가 선택되었다. 그리고 〈That'll Be the Day〉의 발매에 앞서, 브룬스윅은 이후의 창작에 대한 전권을 그에 위임하고, 이로 인한 재정적 책임 역시 그에 위임하게 될 것이라는 조의 기본계약을 맺게 시켰다.
데모에 대단히 인상을 받은 음반사의 중진들은 새로이 재녹음을 할 것도 없이 데모를 그대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싱글의 명의는 크리케츠, 또한 이면의 곡은 〈I'm Looking for Someone to Love〉였다. 페티와 홀리는 후일 브룬스윅이 사실은 데카의 자회사라 그 뜻인즉, 애시당초 버디 홀리를 명의로 녹음을 했어도 전혀 무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크리케츠 명의의 곡은 브룬스윅을 통해 발표되고, 한편 홀리 명의의 곡은 데카의 또 다른 자회사 코랄 레코드에서 출반되는 게 되어, 홀리는 양 음반사와 2중계약을 맺은 셈이 되었다.
1957년 5월 27일 〈That'll Be the Day〉가 출반된다. 직후 페티는 어빈 펠드를 대동시켜 홀리와 크리케츠를 투어에 보냈다. 이들을 따라온 어빈은 R&B 차트에 〈That'll Be the Day〉가 실린 걸 보고서야 이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어빈의 덕으로 그들은 워싱턴 D.C., 볼티모어, 뉴욕 시에서 공연을 따냈다. 8월 16일에서 22일간 뉴욕 시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할 기회도 얻었다. 아폴로 극장에서의 오프닝 공연의 일화로, 크리케츠가 관중들에게서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Bo Diddley〉를 곡목에 넣고서야 비로소 호응을 얻어냈다는 것이 있다. 아폴로에서의 공연이 끝날 무렵 〈That'll Be the Day〉가 차트를 치올라가기 시작했다. 싱글의 성공에 고무되어 페티는 홀리의 솔로 앨범과 크리케츠의 앨범, 이렇게 두 장의 앨범을 기획하게 되었다. 8월 26일 홀리는 딕 클라크 진행의 ABC 프로그램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에서 공연을 가졌고, 뉴욕시를 떠나기 전 에벌리 브라더스를 만나 친구 사이가 되었다.
9월 23일 〈That'll Be the Day〉는 미국 "베스트셀러 인 스토어" 차트에서 1위를 기록, 영국의 싱글 차트에서 11월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9월 20일 코랄에서 〈Everyday〉를 이면으로 넣고 〈Peggy Sue〉를 출반한다. 특기할 것으로 이 싱글에서 홀리는 녹음자(performer)
출처: 버디 홀리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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