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서울특별시
Seoul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문화·인문·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아우르는 수도권의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지정된 도시이고 종주 도시(제1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
장소
Seoul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문화·인문·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아우르는 수도권의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지정된 도시이고 종주 도시(제1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항목이 포함된 사건 파일에서 정보와 관계를 함께 살펴보세요.
이 항목이 포함된 사건 파일이 아직 없습니다.
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문화·인문·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아우르는 수도권의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지정된 도시이고 종주 도시(제1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문화·인문·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아우르는 수도권의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지정된 도시이고 종주 도시(제1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나 서울의 역사는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을 시초로 한다. 삼국시대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번갈아 차지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왕실의 별궁이 세워진 남경(南京)으로 개칭하였다.
유교의 도성제에 따라 한성에 경복궁과 종묘, 사직, 육조거리와 시전을 세우고 이를 둘러싼 한양도성을 갖추어 수도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세도정치 때는 명문가들이 종로에 거주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며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500년 넘게 조선의 수도이자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1896년 대한제국 선포 이래 전차, 교각 등의 근대 기반시설이 건설되면서 변모하기 시작한 한성부는 1910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고, 일제강점기 조선의 수도로서 용산, 영등포 등지로의 영역 확장을 겪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로 개칭되고 특별자유시가 되었으며 이후 1949년,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특별시 지위에 올랐고,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경제성장과 강남 개발로 행정구역 확장 등의 도시 정비를 거쳤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FIFA 월드컵, 2010 G20 정상 회의 등의 국제행사도 다수 개최하였다.
서울은 중앙에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릉산, 청계산, 아차산 등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면적은 605.23 km2로 대한민국 면적의 0.6%이고, 인구는 9,334,828만 명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가 있다. 인구가 가장 많은 구는 송파구이며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 중구이다. 대한민국의 총생산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2018년 서울의 지역 내 총생산은 422조 원이었다.
수도로서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전통 건축과 명소가 밀집해 있는 도시로서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의 5대 왕궁이 이곳에 위치해 있으며, 창덕궁, 종묘, 조선왕릉의 총 세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근현대 건축 역시 수많은 명소가 자리해 있으며 대표적으로 YTN서울타워, 63빌딩, 롯데월드타워,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롯데월드, 코엑스, 파크원 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센터가 이곳에 위치해 있으며, 여의도에는 국회의사당이 위치해 있다.
'서울'은 본래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어 보통명사였으며,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1285년 무렵 편찬된 《삼국유사》는 신라의 국호 가운데 하나인 '서벌(徐伐)'에 "지금 민간에서 '경(京)' 자를 '서벌'이라 새기는 것도 이 까닭이다(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라는 주를 달았다. 국어학자 이기문은 이 기록을 근거로 13세기 말에는 서울을 '셔ᄫᅳᆯ'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 말이 신라의 국호 '서벌'(15세기 한자음으로는 '셔벌')에서 왔다는 설명이 믿을 만하다고 보았다.
신라의 수도 경주가 서라벌(徐羅伐), 서벌, 서나벌(徐那伐), 서야벌 등으로, 백제 말기의 수도 부여가 소부리로 불린 것도 '서울'이 삼국 시대부터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음을 보여 준다는 설명이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서'는 '수리, 솔, 솟'과 통하는 말로 '높다', '신령스럽다'는 뜻을, '울'은 '벌, 부리'가 변한 말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지닌다. 이기문은 둘째 음절 'ᄫᅳᆯ'을 '고을'의 중세어형 'ᄀᆞᄫᆞᆯ'의 'ᄫᆞᆯ'과 같은 계통의 말로 보아 사람이 모여 사는 고장을 가리킨 것으로 추정했고, 제주 방언에서 서울을 '셔나(西那)'라 했다는 《탐라지》의 기록을 함께 들었다. 다만 첫 음절 '셔'가 옛 '시라·시로(斯羅·斯盧)'에서 변한 말이라는 데까지만 밝히고, 그 뜻은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겨 두었다.
'서울'은 고유어여서 대응하는 한자가 없으며, 서울특별시는 한자를 섞어 쓸 때도 '서울特別市'로 적는다. 국립국어원은 이 점에서 '서울'이 우리나라 지명이면서도 서양 외래어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기원전 18년 백제를 세운 온조 집단이 도읍으로 삼은 위례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로 추정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왕도가 함락되자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553년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에 신주(新州)를 두었고, 557년 주의 중심을 북한산으로 옮겨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했다. 주의 중심은 이후 남천(지금의 이천)과 북한산을 오가다가 618년 한산(漢山)으로 옮겨지면서 한산주가 되었다. 고구려가 다스릴 때 이 지역의 이름은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삼국사기》 지리지는 북한산군을 '평양(平壤)'이라고도 했다고 적었다. 이어 《삼국유사》가 고려 시대의 양주를 '남평양(南平壤)'으로 처음 적었고,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도 양주와 한성부를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서기》에는 551년 백제 성왕이 신라 등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의 땅을 얻고 평양을 토벌했으며, 이듬해 한성과 평양을 포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평양'은 흔히 고구려의 한강 하류 거점인 남평양으로 해석된다. 신라 통일 이후 이 지역은 한주(漢州)를 거쳐 경덕왕 때 한양군(漢陽郡)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1067년(문종 21년) 양주에 남경(南京)이 처음 설치되었다가 1076년 다시 양주로 돌아갔고, 1099년(숙종 4년) 남경이 다시 설치되었다. 남경유수관은 1308년(충렬왕 34년) 한양부(漢陽府)로 바뀌었다.
조선은 1394년(태조 3년) 음력 10월 25일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수도의 이름을 한양부라 했고,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년) 음력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이후 조선 시대 내내 '한양'과 '한성'이 함께 쓰였다. 1910년 국권 피탈 뒤 같은 해 10월 1일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이름이 바뀌고 경기도의 하부 행정 구역이 되었다.
광복 직후 미군정은 '경성'(일본어 독음 '게이조')을 그대로 쓰다가 1945년 9월 14일부터 '서울'을 쓰기로 했으나, 관청과 시민 사이에서는 한동안 '서울시', '漢城市', '京城府'가 뒤섞여 쓰였다. 1945년 말 경성부 고문회는 '漢城市'라 쓰고 '서울시'라 읽기로 정하고 1946년 3월 군정청에 개칭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정청은 광복 1주년을 맞아 1946년 8월 10일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발표했고, 이를 바탕으로 9월 18일 군정법령 제106호 〈서울특별시의 설치〉를 공포했다. 법령이 발효된 9월 28일부터 경성부는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도와 같은 지위의 '서울특별자유시'(Seoul Special Free City)가 되었고, 10월 7일부터는 '경성부'와 '부윤'을 각각 '서울시'와 '시장'으로 정식으로 바꾸어 불렀다. 1949년 7월 4일 법률 제32호로 제정되어 8월 15일 시행된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단체를 도, 서울특별시, 시·읍·면으로 정했고, 이로써 '서울특별시'가 법률상 명칭이 되었다.
1955년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땅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고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도 이름을 고치자는 담화를 냈다. 최남선은 '한양'을 대안으로 내놓았고 사학자 이병도도 개칭에 찬성했다. 국어학자 최현배와 김윤경은 '큰 벌판'을 뜻하는 고유어 '한벌'을 제안했으며, 대통령의 이름과 호를 딴 '이승만시'와 '우남시(雩南市)'도 거론되었다. 반면 국어학자 이희승은 고유명사를 보통명사처럼 쓰는 일은 어느 나라에나 흔한 언어 관습이라며 개칭에 반대했고, 《동아일보》 등에는 '서울'이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이라는 반대 의견이 실렸다. 이승만은 1957년 1월 19일 다시 담화를 내 자신의 호를 딴 이름에는 반대하며 '한도'가 적합하다는 뜻을 밝혔으나, 개칭 논의는 이후 별다른 진전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영어 등 로마자를 쓰는 언어권에서는 'Seoul'로 적는다. 이 철자는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프랑스어식 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되며, 파리 외방전교회의 샤를 달레가 1874년 펴낸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도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한 곳을 'Han-iang (Séoul)'로 적었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첫 호에 '서울'과 'SEOUL'을 함께 실었다. 한편 1939년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제안한 논문은 수도를 'Sŏul'로 적었고, 2000년에 고시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기존의 'Seoul'과 같다.
일본어에서는 가타카나로 ソウル라고 적으며, 《일본대백과전서》도 '서울'은 '도읍'을 뜻하는 고유어로 한자 표기가 없다고 설명한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부터 서울을 옛 이름인 '漢城'(한청)으로 불러 왔는데, 이 이름은 실제 발음과 거리가 멀어 혼란을 낳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는 2004년부터 중국어 표기 개선을 논의해 2005년 1월 19일 이명박 시장의 기자회견에서 '首爾'(간체 首尔, 서우얼)을 새 중국어 표기로 발표했다. 중국의 영자 신문 《차이나 데일리》는 새 표기가 'Seoul'과 발음이 비슷하고 '으뜸 도시'라는 뜻을 담고 있어 수도 이름에 알맞다는 서울시의 설명을 전했다. 중국 정부는 이 요청을 빠르게 받아들였고, 2005년 말에는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중화권 대부분의 언론도 '首爾'을 쓰게 되었다. 다만 발표 직후 중국의 일부 언론과 누리꾼 사이에서는 익숙한 이름을 바꾸는 데 따른 혼란을 우려하거나 반감을 드러내는 반응도 있었다. 김현진 등은 이 개칭이 표면적으로는 혼란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지역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한국 측의 경계가 배경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서울 지역에서는 기원전 4000년 무렵부터 한강 유역을 따라 사람이 정착했다. 강동구의 서울 암사동 유적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기원전 4000~3000년 무렵의 신석기 시대 집터 유적으로 추정되며, 197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 집단이 오늘날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왕도가 함락될 때까지 이곳에 도읍을 두었다. 신라는 553년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했고, 진흥왕은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다. 고려는 1067년(문종 21년) 이곳에 남경을 처음 두었고, 숙종 때 남경을 다시 설치해 1104년 궁궐을 완성했다.
1392년 건국한 조선은 1394년(태조 3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고, 이듬해 조선 최초의 정궁인 경복궁을 지었다. 1396년(태조 5)에는 백악산, 낙타산, 목멱산, 인왕산의 네 산 능선을 따라 길이 약 18.6 km의 한양도성을 쌓았다. 서둘러 쌓은 성곽은 1422년(세종 4년) 평지의 토성 구간을 석성으로 바꾸는 등 크게 고쳐 쌓았고, 숙종 때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한성의 인구는 15세기 말 1만 8000호, 10만 명 안팎에서 17세기 20만 명가량으로 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이 함락되고 경복궁이 불탔다. 그 뒤 1611년부터 1872년까지는 창덕궁이 왕의 거처였고, 경복궁은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다시 짓기 시작해 1868년 완성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울에는 우정국(1884)과 배재학당(1885) 같은 여러 근대 기관이 들어섰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1899년 5월 한성전기회사가 남대문과 홍릉 사이에 전차를 개통했고, 1900년 7월 경인선의 한강철교가 개통되었다. 1907~1908년에는 도로 확장을 이유로 숭례문 좌우와 평지의 도성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1
출처: 서울특별시 (CC BY-SA)
확인된 구조화 정보, 사용자 의견, AI가 찾은 관계를 구분해 표시해요.
아직 댓글이 없어요. 먼저 한마디 남겨 보세요.
관계가 언제 생기고 바뀌었는지 날짜순으로 모았습니다. 소식 글과 출처에 적힌 날짜를 기준으로 합니다.
서울특별시 멤버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