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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대한민국(한국 한자: 大韓民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남부에 위치한 나라이다. 약칭으로 한국(한국 한자: 韓國), 별칭으로 남한(한국 한자: 南韓, 문화어: 남조선)이라 부르며 현정체제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이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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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한국 한자: 大韓民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남부에 위치한 나라이다. 약칭으로 한국(한국 한자: 韓國), 별칭으로 남한(한국 한자: 南韓, 문화어: 남조선)이라 부르며 현정체제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이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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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대한민국(한국 한자: 大韓民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남부에 위치한 나라이다. 약칭으로 한국(한국 한자: 韓國), 별칭으로 남한(한국 한자: 南韓, 문화어: 남조선)이라 부르며 현정체제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다.
대한민국(한국 한자: 大韓民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남부에 위치한 나라이다. 약칭으로 한국(한국 한자: 韓國), 별칭으로 남한(한국 한자: 南韓, 문화어: 남조선)이라 부르며 현정체제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이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다. 인구는 2026년 4월 기준으로 5,109만명이고, 이 중 절반이 넘는(50.74%) 2,603만명이 수도권에 거주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그 과정에서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등의 부침이 있기도 했다. 현재는, 2024년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2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2024년 1인당 국민 총소득(GNI)은 명목 3만 6,624달러이다.
2023년 유엔 개발 계획(UNDP)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 개발 지수 (HDI) 조사에서 세계 20위를 기록하였다.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유엔 무역 개발 회의’ 마지막 회의에서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 그룹으로 ‘의견 일치’로 변경하고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다만 높은 자살률, 장시간 근로문화와 높은 산업 재해 사망률, 저출산 등의 사회 문제가 이 같은 성과와 병존한다. 민주주의 수준의 경우,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 2019년 기준 23위의 8.0점을 기록한 바와 같이 아시아에서 그 수준이 가장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대한민국은 주요 20개국(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개발 원조 위원회(DAC), 파리 클럽 등의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8년,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각각 남북에 위치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 중 ‘한(韓)’의 어원은 본래 국가의 명칭이 아니라, 군주를 뜻하는 칭호인 ‘한(汗)’에서 비롯되었다.
군주를 뜻하는 칭호 ‘한(汗)’은 음성적으로 ‘한(韓)’과 동일하다. 역사가들이 군주를 뜻하는 한자 ‘한(汗)’을 단지 소리가 같다는 이유로 ‘한(韓)’으로 잘못 기록하는 바람에, 결국 나라 이름이 되었다. 여기에, 나라가 통일 되었다는 뜻으로 국호에 ‘대(大)’를 넣어 ‘대한(大韓)’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헌법 표제 및 제1조에 따라 공식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며 1950년 1월 16일 제정된 국무원 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에 관한 건"에 따라 약칭은 ‘대한(大韓)’ 및 ‘한국(韓國)’으로 정해져 있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하던 지명인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대한(大韓)'이나 '한국(韓國)', '한(韓)'으로 대체하였다. 이에 따라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 '한국(韓國)' 등으로 부른다.
코리아(Korea)란 영문 국호의 어원은 중세 국가인 고려(高麗)에서 유래하였다.
고구려가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한 것을 918년 건국한 중세 왕조 고려(高麗)가 계승하여 '고려'라는 국명이 아라비아 상인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고려'를 코레(Kore), 코리(Kori)로 불렀고, 이 명칭에 '~의 땅'을 의미하는 '-a'를 붙어 '고려인의 땅'이라는 '코리-아'(Korea), '코리-아'(Koria)가 되었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韓國) 또는 남한(南韓) 등으로도 부른다. 반대로 한반도 북부를 점거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2003년에 고구려 고분군의 단독 등재를 추진하며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2004년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고구려 고분군은 마침내 공식 등재되었다. 고구려 문화유산의 등재는 단순한 목록 추가를 넘어, 우리 역사를 확고히 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 기슭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하는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의 멸망 이후, 918년 국호를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 고려로 정하고 936년 고려를 건국하며 민족 통일을 완수하였다.
고려 왕조의 도읍지인 개성 역사유적지구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3년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개성 역사유적지구는 위원들의 만장일치 찬성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개성의 고풍스러운 성곽과 기와지붕들은 고려 왕조의 역사를 확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92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선이 건국 되었다. 조선 후기는 근대 사회의 태동기로 볼 수 있으며, 기존의 양반관료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사회적 격변이 일어났다. 조선은 19세기 말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에 시달렸다. 근대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분열, 특히 세도정치로 인한 왕실 권력의 약화 등은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조선은 1910년 멸망했으며, 순종 황제는 이에 동의하여 국권 상실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멸망을 맞이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을 위한 3·1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시장)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4월 11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인사들이 빠져나가면서 국무령 중심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다.
이후,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세력과 김성숙,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미국의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9월을 기한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이 3·1운동에 따라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맺은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하였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수립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임정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생겼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조선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인공 내각을 해산하였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 내에는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소공위를 개최했으나 양측 주장이 엇갈려 성과 없이 끝났다. 이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하려고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한민당과 남로당 등 좌우익 세력 등이 불참했고 중도파 세력만이 참여한 소규모 운동이 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에 여운형 암살 등 해방정국의 잇단 사건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여 명에게 실시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고 밝힌 상황에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과 사회주의적인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였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며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을 제기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이 불가능한 형세였다.
1948년 1월 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했다. 5월 10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제헌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구성하였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을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그러한'은 대한민국이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주민들 대다수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수립하였고, (분단상태를 고려할 때)선거가 가능했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임을 뜻한다. 이미 48년 9월 9일에 한반도 이북에서는 북한을 선포하였지만 그 해 12월 결의에서 남한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이었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났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겼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학도병들)이 훈련없이 전투에 참여하여 무고하게 죽고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을 완전한 북한 공략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참전하고 소련이 군사를 지원하여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고 이로 인해 전쟁은 장기화하였다. 이후 38도선 인근 중부 지방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오전 10시에 체결된 후에 효력이 발생한 22시에 완전히 전투를 종료하고 군사 분계선을 형성하면서 오늘날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진다.
6.25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이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을 파괴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과 북한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자 한국의 분단이 더욱 고착
출처: 대한민국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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