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534
오다 노부나가
Oda Nobunaga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1534년 6월 23일~1582년)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다이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의 다이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후 가문의 통치를 놓고 가족들과 다툼을 벌였다. 노부나가의 아버지는 미나모토 가문의 고귀한 가…
인물1534
Oda Nobunaga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1534년 6월 23일~1582년)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다이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의 다이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후 가문의 통치를 놓고 가족들과 다툼을 벌였다. 노부나가의 아버지는 미나모토 가문의 고귀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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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1534년 6월 23일~1582년)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다이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의 다이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후 가문의 통치를 놓고 가족들과 다툼을 벌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1534년 6월 23일~1582년)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다이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의 다이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후 가문의 통치를 놓고 가족들과 다툼을 벌였다. 노부나가의 아버지는 미나모토 가문의 고귀한 가문 중 하나인 아시카가 가문을 섬기고 성을 받았던 명문가의 후손이나 세력이 미약했다. 그러나 뛰어난 실력과 혈통적 정당성을 명분으로 오다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들 가문은 일본에서 혈통적으론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과거 그들의 주장처럼 천황의 혈통을 가진 귀족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노부나가의 삶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들은 일본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568년의 교토 입성은 센고쿠 시대의 종식을 의미하며, 동시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명칭은 그가 세운 아즈치성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축출한 일은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막부였던 아시카가 막부의 종식을 뜻했으며,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끄는 약 2만 5천에서 4만 명 규모의 대군과 맞서 싸웠는데, 노부나가는 단 3천 명의 병사로 기습을 감행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노부나가를 전국의 군사적 중심 인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1568년, 그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입성하였다. 요시아키는 그를 관령(간레이, 쇼군의 보좌직)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쇼군의 권한을 거의 의례적인 일에만 국한시키는 일련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에 반발한 요시아키는 여러 다이묘들과 승병들을 규합해 연합 세력을 꾸렸고, 노부나가는 1570년부터 1573년까지 이들과 싸워 결국 요시아키를 패배시켜 아시카가 막부를 종식시켰다.
1573년부터 1578년까지는 황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관직을 받았고, 마침내 왕실 정권에서 세 번째로 높은 우다이진까지 올랐다. 그러나 1578년에는 군사적 임무를 이유로 모든 직책을 사임하였다.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문과 맞붙었고, 화승총 부대를 이용해 기존의 일제사격 방식이 아닌 교대식 사격을 도입하여 다케다의 전설적인 기마대를 무찔렀다.
1582년경, 노부나가는 일본의 중심 지역과 주요 교통로인 도카이도, 나카센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 영향력을 서쪽으로까지 넓히려 하였다. 각 지역의 정복을 위해 장수들을 파견한 뒤, 자신은 혼노지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주요 장수 중 한 명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인해 포위되었다. 이 사건은 ‘혼노지의 변’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부나가는 그 자리에서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절이 전소되어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노부나가의 정복 사업은 오랜 내전과 영주 간 다툼으로 혼란했던 일본을 통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주요 장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권력을 이어받았으며, 1591년 일본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이자 가신으로서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를 열어 통일을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노부나가는 ‘일본 삼대 통일자’ 중 첫 번째 인물로 꼽힌다.
덴분(天文) 3년(1534년) 5월 오와리국의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와 도치다 고젠(도치다 마사히사의 딸)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명은 깃포시(きっぽうし)였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단조노조 가문’은 오와리국 하사 군의 슈고다이였던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기요스 오다 가문)의 가신이자 분가로, 기요스 삼봉행이라 불리는 가문이었다. 당시 오와리국에서는 슈고였던 시바씨의 권세가 이미 약화되었고, 슈고다이인 오다 씨 역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슈고다이 오다 다쓰카쓰 등의 지원을 받아 이마가와 우지토요로부터 나고야성을 탈취하였다. 이후 노부히데는 오와리국 내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편, 노부나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나고야성・고와타리성・가쓰하타성의 세 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나고야성 설은 『국사대사전』에도 수록되는 등 정설로 여겨졌으나, 야마시나 노부쓰구의 『노부쓰구쿄키』 등의 기록을 근거로, 덴분 3년 당시 오다 씨가 아직 나고야성을 점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아이사이시가 소장한 『오슈 고조시(尾州古城志)』 등의 사료에 “가쓰하타성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 점 등을 바탕으로 1992년에 발표된 논문을 계기로 최근에는 가쓰하타성 설이 유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534년(덴분 3년) 음력 5월 12일 그는 오다 노부히데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배다른 형이 한 둘 있었다고 하나 서자들이었고, 노부나가의 어머니인 도타 고젠(土田御前)이 본처였으므로 집안 대대로 적장자에게 주어지는 아명인 깃포시(吉法師)와 나고야성(名古屋城)을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거지로 주위에서 '오와리의 멍청이(尾張の大うつけ)'라고 불렸는데, 한번은 오다의 본가,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성인 기요스성 밑 거리에 불을 놓아 집안 전체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본가는 일단 노부히데의 힘에 밀려 납작 엎드려는 있지만 원래 노부나가 집안보다 높은 신분이라 잠재적인 긴장관계였다. 반면 청소년의 노부나가는 당시 일본에 처음 전해진 조총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신분에 상관없이 논을 매는 농민들과 곧잘 어울리며 재야 세력과도 친분을 쌓는 등 통치자로서 싹을 보이기도 했다.
1546년(덴분 15년)에는 아버지의 거처인 후루와타리(古渡) 성에서 성인식을 하고 아버지에게 가즈사노스케 노부나가란 정식 이름을 받았다. 2년 후에는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의 교섭으로 적대관계였던 미노의 다이묘 사이토 도산의 딸 키쵸(帰蝶,훗날의 노히메)와 정략결혼한다. 전국 시대 일본의 귀족 관례로는 장인 장모가 혼례에 따라가지 않았으므로 사이토 도산은 노부나가의 진짜 얼굴을 보러 갈 수는 없었다.
1548년(덴분 17년) 당시 오다 집안은 숙적이었던 동해도의 패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전쟁 상태에 있었다. 오와리 국과 이마가와의 스루가 국 사이에는 미카와 국이 끼여 있었는데,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집안은 이마가와 집안에 대해 종속상태에 있었다. 미카와 국은 혼란의 와중에서 다이묘가 가신의 손에 죽는 비극을 겪은 끝에 본성인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이마가와 집안이 보낸 성주 대리에게 넘기고, 더욱이 유복자가 된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를 이마가와 집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호송 도중 오다 가문이 납치에 성공한다. 미카와 국을 자기 편으로 삼기 위한 노부히데의 책략이었는데, 노부나가는 납치돼 온 8살 아래의 마쓰다이라 다케치요(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곧 친해졌고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오와리 국과 미카와 국이 견고한 동맹관계를 맺는 밑거름이 된다. 이 견고한 동맹은 노부나가가 교토 상경을 달성하고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혼노지에서 죽을 때까지 지속됐다. 다만, 납치된 다케치요는 오다와 이마가와 양가의 협상 끝에 일단 이마가와로 보내졌다.
1549년(덴분 18년) 노부나가와 사이토 도산은 현재 기후 현과 북부 아이치 현의 경계인 세이토쿠지(正徳寺)에서 회담을 가졌고 이때가 돼서야 도산은 '멍청이'라 불리던 노부나가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쇼토쿠 사 경내로 갈 때까지 짐승털로 된 조끼에 화승총을 메고 반라 상태에서 말을 타고 갔는데 사이토 도산이 몰래 숨어서 이를 지켜봤다고 한다. 회담 장소에서 노부나가는 정식 관복으로 단정하게 회담을 가졌고 살모사란 별명의 장인과 기량을 겨뤘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집안과의 결전에서 조총을 사용하려 했는데, 대량의 조총을 반입하려면 사이토 도산의 영지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장인과의 회담에서 조총의 안전한 반입을 확약받고 조총의 산지였던 오미 국(近江-현재 시가현)의 구니토모무라(国友村)에 5백 정을 주문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1551년(덴분 20년)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자 가권을 승계받았다. 노부히데는 애첩의 품에서 갑자기 서거했는데, 후계를 단단히 하지 않고 죽은 아버지에게 맏상주 노릇을 해야할 노부나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참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식이 끝나갈 무렵이 돼서야 겨우 얼굴을 들이민 노부나가는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 영정에 향을 던지듯 뿌려버렸다. 일생을 모든 권위에 싸움을 걸듯 살았던 노부나가는 원래도 오와리 지배층들에게 평이 좋지 않았는데 장례식장의 폭거로 다시 한 번 문중의 반감을 사게 됐다.
1553년(덴분 22년) 노부나가의 대부이기도 했으며 사범이었던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가 노부나가에게 남기는 유언장만 남기고 자결하자 노부나가는 세이슈 사(政秀寺)를 지어 그의 혼령을 위로했다. 그의 장남인 고로우에몬이 노부나가에게 불경죄를 저질러 그에 대한 사죄 및 앞으로 주군의 진로에 대해 목숨을 걸고 간언한다는 의미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히라테 마사히데는 다도와 와카(일본 시조)에도 조예가 깊어 교토 황궁에서 보낸 야마시나 토키츠구 경(山科言継)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바도 있었고, 외교면에서 크게 활약해 각종 전투 후 국경 설정 문제나, 원래 사이가 나빴던 사이토의 미노 국과 정략 결혼 동맹으로 이마가와 집안에 대항케 하는 등 활약했었다.
1554년(덴분 23년) 오다 씨 본가의 당주인 노부토모는 노부히데가 죽은 후 다시 야심을 드러내, 노부나가를 폐하고 그의 동생 노부유키를 옹립해 실권을 다시 쥐려 했다. 과거 오와리는 이마가와의 침공으로 인해 원래 다이묘인 시바씨(斯波氏,무로마치 막부가 오와리에 임명한 지방관)의 힘이 쇠하고, 2인자였던 오다 야마토노가미의 필두인 오다 노부토모가 실권을 쥐었었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방계로서 관아의 아전에 지나지 않는 단조노츄 직이었으나, 뛰어난 지모와 전투력으로 노부토모에게서 실권을 뺏었었다. 노부나가 암살 계획까지 얘기가 나왔었는데, 일찍이 2인자 가문 노부토모에게 쫓겨났던 시바 요시미쓰(斯波義統)가 이같은 사실을 노부나가에게 밀고했다. 노부토모는 황급히 요시미쓰를 살해했으나 늦었다.
노부나가는 숙부 노부미쓰(信光)와 함께 노부토모 토벌을 단행하고 역적으로 몰아 처형한다. 오다씨의 본가인 야마토노카미 집안을 멸문시킨 노부나가는 나고야 성에서 야마토노카미의 거점인 기요스 성으로 거소를 옮긴다. 이어 무로마치 막부에 청원해 오와리 슈고직에 오른 노부나가의 단조노츄 집안은, 서출 집안에서 명실공히 오다씨의 종가로 격을 높이게 됐다. (우연찮게 숙부인 노부미쓰도 이 때 죽는데 사인이 명확히 밝혀지진 않고 있다.)
집안 단속을 마친 그는 무라키토리데(村木砦)의 전투에서 이마가와의 침공을 다시 한 번 저지한다.
1556년(코오지 2년) 음력 4월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맏아들 요시타쓰에게 살해된다.(나가라가와 전투) 노부나가는 도산에게 급히 구원병을 내 기소강(木曽川) 너머 오오우라까지 나갔으나 도산을 죽이고 기세가 오른 요시타쓰 군에 고전하면서 본 영지로 퇴각한다.
노부나가의 뒷배가 돼줄 사이토 도산이 죽고 오와리는 북쪽 동쪽 양면에서 적을 맞게 됐다. 그러자 그의 다이묘로서 기량을 의문시하게 된 중신들이 생겼다.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그들인데, 3년전 노부토모 때처럼 노부나가를 폐하고 동생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했다. 노부나가 편에는 모리 요시나리, 사쿠마 모리시게, 사쿠마 노부모리 등이 있어 양파가 대립했다.
도산의 서거를 호기로 생각한 노부유키 파는 음력 8월 24일 거병했는데 이나오 전투에서 바로 패하고 스에모리 성에 농성중인 노부유키마저 포위되나, 노부나가 노부유키 형제의 생모 도다 고젠의 중개 하에 노부유키 파들은 목숨을 건진다. 거기에 배다른 형인 노부히로도 사이토 요시다쓰와 결탁해 기요스 성을 뺏으려 획책하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미수에 그쳤다. 노부히로 역시 사면된다.
1557년 해를 넘겨 노부유키는 다시 모반을 꾀한다. 2차 시도 때는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가 직접 노부나가에게 모반 기도를 알려왔고, 하나 남은 오다의 또다른 본가 이와쿠라 오다 집안(岩倉織田家)이 연루 돼있는 등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부나가는, 병
출처: 오다 노부나가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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