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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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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라틴어: gladius, 글라디우스)는 고대 로마의 볼거리 중 하나로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한다. 명칭의 유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을 채택했는데, 투사 중에 일부가 이 무기,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던 것에서 왔다고 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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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라틴어: gladius, 글라디우스)는 고대 로마의 볼거리 중 하나로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한다. 명칭의 유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을 채택했는데, 투사 중에 일부가 이 무기,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던 것에서 왔다고 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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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투사(라틴어: gladius, 글라디우스)는 고대 로마의 볼거리 중 하나로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한다. 명칭의 유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을 채택했는데, 투사 중에 일부가 이 무기,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던 것에서 왔다고 한다..
투사(라틴어: gladius, 글라디우스)는 고대 로마의 볼거리 중 하나로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한다. 명칭의 유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을 채택했는데, 투사 중에 일부가 이 무기,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던 것에서 왔다고 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검노(剣奴, 일본), 글라디에이터(영어권)가 있다.
로마 공화정이나 로마 제국의 많은 도시에는 원형극장(원형투기장)이 존재했으며, 그곳에서 투사들은 투사끼리 싸우거나, 또한 인공 연못 등을 준비해 모의해전(나우마치아)을 벌이기도 했다. 투기 대회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의 영향으로 쇠퇴하였으며 404년에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명령으로 투기장이 폐쇄되었으나 그 후에도 각지에서 계속되다가 681년 공식적으로 금지되자 소멸되었다.
투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뭐라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은 없다.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인의 제물 의식을 로마가 채용한 것이라는 설은 현재 지지받고 있지 않다. 또 하나는 남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 기원설인데 기원전 4세기 파에스툼(Paestum)의 무덤 벽화에는 시합을 하는 투사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역사학자 리바우스는 캄파니아인들이 적인 삼니움인을 투사로서 싸우게하였다고 저술했다. 기원전 1세기경은 남부 이탈리아가 투사가 최고로 성행되었던 지역이었다.
기록상 최고로 오래된 투사 시합은 기원전 264년에 로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식 즈음하여 보아리움 광장에서 이루어진 투사 시합이었다. 역사학자 리비우스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의 투기 대회를 몇 개 언급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기원전 174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프라미니우스(Titus Quinctius Flamininus)가 주최한 74인의 투사로 이루어진 투기 대회가 특히 주목할만 했다고 저술했다. 이후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의 추도 투기 대회(무누스)가 인기를 끌었는데 제물을 바치기를 원하는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의 축제 즈음에 개최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원형투기장이 건설됨에 따라 도시 로마 안에서의 투기 대회는 주로 포로 로마노에서 열리게 되었다.
추도를 목적으로한 투기 대회는 그 규모가 더욱 대단하였으며 그러다가 변질이 되어 고인을 추도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볼거리로써 행하여지게 되었다. 결국 정치가의 프로파간다(선전)을 위한 이벤트로 변질되었다. 민중은 투기 대회에 열광했고, 정치가에게 투기 대회를 개최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추도 투기 대회는 공직 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때문에 투기 대회가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해져 갔으며, 이를 걱정해 투기 대회의 개최일수와 투사의 수를 규제하기 시작했으나 준수되지 않았고, 민중들도 규제가 준수되지 않는 것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공직 선거와 투기 대회가 연착되는 현상은 제정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영토확장과 더불어 대량의 전쟁 포로를 획득했다. 로마는 포로들을 각각의 민족 전통의 장비들로 무장시켜 투사로 만들었는데, 기원전 2세기 초에는 투사의 스타일인 갈리아 투사와 삼니움 투사가 등장했고 기원전 1세기에는 트라키아 투사가 등장했다.
투사의 시합이 크게 흥행했던 기원전 73년에 카푸아의 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최대규모의 노예 봉기(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일으켰다. 약 70인의 투사들이 탈주를 감행하여 시작된 이 사건은 12만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규모가 커졌으며 이탈리아 반도를 뒤덮었다. 반란군은 로마병 포로에 투사 시합을 강요했는데 이를 고대 역사학자 오로시우스는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71년에 스파루타쿠스 반란군은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어 전멸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투기 대회를 정치 프로파간다(선전)의 장으로 활용했는데 기원전 65년에 640인이나 되는 투사를 모아 대규모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기원전 46년에는 더욱 대규모로 개최했는데 총 1,200 명의 투사를 끌어모았다. 카이사르는 로마 근교의 마르스 광장 (로마)(Campus Martius)에 연못을 만들어 군함을 띄우고는 모의해전(나우마치아)를 개최해 인기를 얻었으며, 그 후 황제들도 이를 따라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65년의 축제를 오래전에 타계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또한 기원전 46년의 축제에는 전례를 깨고 여성(8년 전에 죽은 딸 율리아 카이사리스(Julia Caesaris))의 추도를 목적으로 투사 시합을 개최하여 형식적으로 더욱 종교적인 측면이 있었다. 연구의 기초를 쌓아 올린 역사학자 조지 빌(George Ville)은 이제까지 투사 시합과는 다르게 별도로 개최되어왔던 순수한 볼거리인 베스티아리이(Bestiarii:짐승과 싸우는 투사)를 언급하였다. 그는 "베스티아리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맹수를 죽이는 “야생 맹수 사냥”(Venationes)이 갑자기 투사 시합의 시작 전에 보여주는 볼거리로 추가되기 시작한 것이 투사 경기의 세속화에 결정타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행태가 6년에 개최되었던 드루수스를 추도하는 투기 대회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 ~ 14년)는 재위 중에 8번 투기 대회를 주최하여 1만명의 투사를 싸우게하였고 다른 경기와 합치면 3500 마리의 맹수를 죽였다. 다음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14년 ~ 37년)는 반대로 한 번도 볼거리를 개최하지 않았기에 매우 인기가 없었다. 칼리굴라 황제(재위 37년 ~ 41년)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년 ~ 54년)는 투사 시합을 성대하게 개최하였으며, 이와 달리 네로 황제(재위 54년 ~ 68년)는 전차경기나 연극을 좋아했다. 귀족들도 인기를 얻기 위해서 사적으로 “라니스타(lanista: 투사 양성소 소유자, 투사 관리자)”나 “도크토레(Doctore: 투사 트레이너)”를 고용해 투사단을 조직했다.
민중은 투기 대회를 개최해주기를 강력히 요구했으며, 북부 이탈리아의 폴렌티아의 벼슬아치가 사망했을 때, 장례 때문에 마을에 추도 투기 대회가 개최되지 않아서 화가 난 주민들이 힘으로 장례식을 저지하려해, 병사들이 출동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또한 59년에는 남부 이탈리아 폼페이의 원형투기장에 흥분한 폼페이 주민들과 누케리아 주민들간에 난투가 벌어졌고 이후 10년간 투기 대회의 개최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79년에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로 이 마을이 땅 속에 묻혀버렸고, 발굴된 유적에서 원형투기장과 투사 양성소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또한 방어구 출토품과 투사에 관해 쓰여진 민중들의 낙서들도 발견되었다. 이는 고대 로마의 투사의 실상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80년, 도시 로마에는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프라이우스 원형투기장(콜로세움)이 완성되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79년 ~ 81년)는 이 콜로세움의 준공식으로 대규모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맹수 사냥과 투사 시합, 그리고 모의해전이 100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하루에 5천 마리의 맹수가 죽어나갔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는 1만명의 투사를 모아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고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년 ~ 192년)는 스스로 투사가 되어 735회나 싸웠다. 로마 세계 전체로는 186 곳 이상의 원형투기장이 확인되었으며, 추가로 86곳의 미확인 투기장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년 ~ 96년) 시대 이후, 도시 로마에서는 투기 대회의 개최는 벼슬아치인 관리관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대양성소(Ludus Magnus)”, “갈리아 양성소(Ludus Gallicus)”, “다키아 양성소(Ludus Dacicus)”, 그리고 “조조(早朝)양성소(Ludus Matutinus)”의 4군데 제국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로마의 대양성소는 지하통로로 콜로세움과 연결되어 있었다.
투기 대회는 긴 시간 동안 로마 최고 인기 오락거리였지만 기독교는 이에 비판적이었다. 380년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나서는 교회에서 라니스타와 도크토레를 시작으로 투기 대회와 관련된 모든 자들을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로 규정했다. 그래도 투기 대회는 규모가 축소되는 와중에도 계속되었으나 인기가 점점 하락했고, 훈련생도 모이지 않게 되었다. 404년에 투기장에 시합을 금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인 수도사 성 텔레마쿠스가 관중이 던진 돌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재위 395년 ~ 423년)는 투기장을 폐쇄시켰다. 이후, 투기 대회는 거의 개최되지 않았으나 440년경까지는 그래도 개최되었다 전해진다. 523년에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는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투기 대회를 금지한다는 포고를 내렸고, 이 시기까지도 아직은 개최되긴 하였으나, 6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투기 대회가 소멸했다.
투사의 쇠퇴와 소멸은 크리스트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3세기 이후에 투사 시합에서 지면 전원 살해되도록 변한 것과, 모자이크 그림에서 심판을 받는 모습이 사라진 점, 다채롭던 투사의 스타일도 그 중에 특히 인기가 있었던 세크토르(Secutor:추격투사)와 레티아리이(Retiarius:그물투사) 투성이로 변해간 점 등을 종합해서, 투기 대회가 찰나의 유혈 사태로인한 흥분만을 추구하게 되어 시합이 과격하고 단순하게 된 결과, 관객에게 투사의 기술로 매료시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는 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단순하게 죽을지 살지를 정하는 죽고 죽이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 인기를 잃어버려 소멸에 이른 원인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투사가 되는 자의 대부분은 전쟁 포로나 노예시장에서 사고팔리던 자들이라 반항적인 기질이 강해 주인이 투사로 팔아버리는 식으로 걸러내 버려진 노예가 많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유민이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연구 학자들의 계산으로는 투사 10명 중 2명은 자유민 출신이었다고 한다. 또한 범죄자도 투사로서 투기장으로 보내졌다. 투사는 승리를 계속하다보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로마인들로부터 “타락한 자”, “야만인”, “수치스러운 자”(infamis:로마인의 즐거움을 위해 로마법의 보호에서 제외된 계층을 infamia라 하며, 이 계층에 속한 자를 infamis라 칭한다)로 여겨졌고 사회적인 지위도 낮았으며 창녀와 동급으로 보았다. 노예 중에도 가장 최하 등급의 것들로 멸시당했다.
징집된 노예나 자유민들은 라니스타(lanista:투사 훈련소 소유자, 투사 관리자)가 소유한 투사단(familia gladiatorial)에 속하게 되며, 그 투사 양성소(Ludus)에서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받고 투기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라니스타는 투기 대회에서 살아남아 자유를 얻은 전직 투사들로 재물을 쌓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매춘업의 업주와 동급의 비천한 신분으로서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
투사 양성소에서는 기술을 지도하는 전직 투사 출신의 “도크토레(Doctore: 투사 트레이너)”나 교사(Ludi Magister), 고도로 숙달된 의사나 마사지사 등이 있어 투사 양성에 힘썼다. 도크토레(Doctore: 투사 트레이너)는 투사들에게 행진하는 법에서부터 무기를 다루는 법, 발기술, 찌른 검으로 어떻게 동맥을 찾는지 등을 지도하고 철저히 훈련시켰다. 투사들은 기본적으로 목검을 들고 연습했으며, 짚 인형을 상대로 덤비는 연습, 훈련생끼리 연습시합 등으로 경험을 쌓아갔다. 목검으로만 훈련했던 이유는 반란의 위험을 막기 위함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함에서였다. 진검은 투기 대회 때 말고는 주어지지 않았다.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벌이 주어졌기에,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자도 있었다. 제정 초기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세네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만 자들의 사례를 언급했다. 어떤 게르만인 베스티아리이(Bestiarii:짐승과 싸우는 투사)는 변소에서 오물을 세척하는 스펀지 봉으로 목구멍을 찔러 자살했고, 또다른 베스티아리이는 마차로 이송되던 중에 조는 척을 하며 마차 바퀴에 머리를 들이밀어 자살했다. 로마인의 볼거리를 위해 투사 동료끼리 싸우게 되자, 동료와 싸우기 싫었던 야만족 출신들이 서로의 목을 졸라 절명한 사건도 있었고, 모의해전 중에 한 야만족 전사는 로마인들
출처: 검투사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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