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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South Africa
남아프리카 공화국(영어: Republic of South Africa 리퍼블릭 오브 사우스 아프리카[*], 아프리칸스어: Republiek van Suid-Afrika 레푀블릭 판 쇠이트아프리카)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자리한 공화국이다. 줄여서 남아공(南阿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5,919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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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영어: Republic of South Africa 리퍼블릭 오브 사우스 아프리카[*], 아프리칸스어: Republiek van Suid-Afrika 레푀블릭 판 쇠이트아프리카)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자리한 공화국이다. 줄여서 남아공(南阿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5,919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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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영어: Republic of South Africa 리퍼블릭 오브 사우스 아프리카[*], 아프리칸스어: Republiek van Suid-Afrika 레푀블릭 판 쇠이트아프리카)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자리한 공화국이다. 줄여서 남아공(南阿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5,919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여 세계에서 24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국가 면적은 대략 1,221,037km²에 달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3개의 수도를 가지고 있는데,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의 80%는 흑인 혈통이며, 다양한 아프리카계 언어들을 사용하는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20%에는 대부분 유럽계, 그온 아시아계 국민들이 포함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남부 해안선 2,798킬로미터를 점하고 있으며, 남대서양과 인도양에 동시에 국경을 걸치고 있다. 북부에는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가 있으며, 동부와 북동부에는 모잠비크와 에스와티니가 있고, 내부에 내륙국인 레소토가 자리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구세계, 혹은 동반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다민족 국가로 다양한 문화와 언어, 종교들이 뒤섞여 있다. 이를 잘 보여주듯이 헌법에도 11개의 공식 언어가 등재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양이다. 2011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화국에서 가장 많이 쓰인 언어는 22%의 줄루어, 그 다음이 16%의 코사어다. 그 뒤로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하여 다수의 백인계 국민이 사용하는 아프리칸스가 13.5%이며, 영국 식민지의 경험으로 인하여 영어도 9.6%나 사용된다. 특히 영어는 국제 공용어의 지위 때문에 공공, 그리고 상업적으로 상당히 많이 쓰이는 언어이기도 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한번도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국가로, 거의 100년 가깝게 선거로 지도자들을 선출해왔다. 다만 1994년까지는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한계점도 동시에 존재한다.
20세기 내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해온 흑인들은 기득권인 소수 백인층에 맞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해왔고,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근현대사의 중추를 이룰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1948년에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당은 최악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공연히 실시하였고, 이후 아프리카 국민회의 등이 이끄는 국내외 운동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1980년대부터는 점차 정책이 완화되기 완화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에는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언어에 상관없이 동등한 정치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법치주의와 평등의 가치가 제대로 도입되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민족적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국가로 발전하였는데, 이 때문에 외국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종종 ‘무지개 나라’ 부르기도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개발도상국으로 평가되며, 인간개발지수는 세계 113위로 아프리카에서 7번째로 높다. 세계은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아프리카 2위의 경제국으로 평가하며 신흥산업국으로 분류하였고, 세계 순위로 따지자면 경제규모 33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중견국으로 평가하나, 워낙 약소국이 많은 아프리카의 현실 탓에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는 나름대로 지역강국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커먼웰스와 G20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다만 여전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범죄와 가난, 불평등이 만연해 있으며, 국민의 4분의 1이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류 유적지를 가지고 있을 만큼 인간이 거주한 지 오래된 국가이다. 고고학자들은 가퉁 지방에 있는 동굴들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간 유골들 중 하나를 발견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지방들에서도 거주지 유적, 사냥터 유적, 인간 유골들을 다수 발견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당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적어도 약 3백만년 전부터는 남아프리카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호모 에렉투스, 호모 로데시엔시스, 호모 에르가스테르, 호모 하빌리스, 호모 날레디 등이 살고 있었으며, 또한 현생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도 함께 살고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 남부에 최소한 17만년 이상 살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사용하는 반투족이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현재 보츠와나와 짐바브웨 사이에 있는 림포포 강 남부까지 빠르게 이르렀으며, 이후 이 곳에 본래 살고 있던 코이코이족과 산족들을 흡수한 후 끊임없이 남진을 계속하였다. 반투족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남진한 부족 그룹은 코사족으로, 그레이트피시 강까지 도달하며 철기 문화를 퍼뜨리고 토착 민족들을 흡수해들였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지역에 도착했을 즈음, 남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약 1,000여 년 전쯤에 아프리카 타 지방에서 이주해온 반투족들이었다. 이들은 크게 코사족과 줄루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1487년에는 포르투갈 탐험가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 남부에 원정을 떠났다. 12월 4일, 그는 현재 나미비아 지역에 있는 왈비스 만에 상륙하였고, 이후 그는 아프리카 대륙 서안을 따라 남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488년 1월 8일 이후에는 격렬한 폭풍에 가로막힌 탓에 해안가에서 바다쪽으로 떠밀려 나와, 아프리카 최남단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아프리카 동부 해안가로 이동하였다. 다만 1488년 5월에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기 위하여 길을 가고 있던 도중에는 아프리카 최남서단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하여, 이 곳에 ‘폭풍의 곷’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붙였다. 디아스의 보고를 받은 당시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는 그가 개척한 항로가 부와 황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 아프리카 최남서단의 이름을 ‘희망봉(喜望峯, Cape of Good Hope)’이라고 변경하였다.
17세기 초 즈음에 포르투갈의 해상력이 점차 약화되어가기 시작하자, 그 대신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서로를 제치고 인도와의 향신료 거래를 독점하기 위하여 경쟁을 벌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01년부터 남아프리카 지역에 새로운 무역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사 작업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을 새로운 무역 기지로 삼았다. 네덜란드는 한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이 희망봉에 몇 달동안 좌초했던 1647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좌초한 선박의 선원들은 이 곳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얻어냈고, 워낙 토질도 좋았기에 채소도 길러내어 자급자족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네덜란드로 구조되어 돌아간 이후 그들은 희망봉의 식민지화 잠재력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1652년에 희망봉 항로를 발견한지 대략 150여 년이 지났을 때, 얀 반 리베크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도움을 받아 희망봉에 나중에 케이프타운의 원형이 되는 첫 식민기지를 건설하였다. 당시 식민기지에는 스스로를 ‘자유시민’이라고 부르는, 해외 네덜란드 식민지에 거주하며 동인도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다수 모여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동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수많은 노예들을 실어왔고, 이때부터 점차 이들간의 혼혈들이 발생하며 남아프리카 지역은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한 사회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와 네덜란드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남아프리카 지역의 새로운 민족으로 점차 자리매김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점차 남서쪽으로 확장하며, 그 곳에 본래 살고 있던 코사족들과 코사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그레이트피시 강 근처에 있는 비옥한 목축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최전방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땅을 개척했던 네덜란드계 농부들은 스스로를 ‘보어인’이라고 불렀다. 보어인들은 점차 느슨한 형태의 자경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고, 코사족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인근 코이산 족들과도 연합을 맺었다. 네덜란드와 코사족은 몇 십년 동안 잔인하고 참혹한 전투를 시시때때로 벌였고, 약탈이나 강간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1795년과 1803년에 대영제국은 프랑스 1제국이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795년과 1803년 사이에 케이프타운을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1803년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나마 다시 네덜란드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에 다시 영국령으로 편입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케이프타운은 공식적인 영국령으로 인정받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제국 공식 영토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다. 1818년 즈음부터는 영국인들이 점차 케이프타운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이 유럽인 노동자들의 수를 확충하고 코사족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들여온 자들이었다. 19세기 초반, 줄루족들은 샤카 줄루의 지도 하에 힘을 키우고 영토를 넓혀갔다. 샤카 줄루가 벌인 전쟁으로 인하여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부족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대략 100만 명에서 200만 명의 원주민들이 죽어 1820년대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는 인구밀도가 대단히 희박해졌을 정도였다. 이후 줄루족에서 파생된 마타벨레족은 음질리카즈 왕 아래에 거대한 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1800년대 초, 영국 당국에 의해 쫓겨난 많은 네덜란드 이민자들, 즉 보어인들은 케이프타운에서 뻗어나오기 시작하여 인근 트란스발, 오렌지 자유국, 나탈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해나가며 보어 공화국, 나탈리아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등을 세웠다.
1867년에는 이 곳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고, 1884년에는 금 광산이 발견되어 엄청난 규모의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가 시작되었다. 이 광물들의 발견으로 남아프리카 지역의 중요성을 깨달은 영국은 이 곳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고, 이 때문에 원래의 흑인 거주민들과 네덜란드계 보어인들, 그리고 새롭게 이주해들어오는 영국인들 사이에서의 갈등은 점차 커져만 갔다. 1876년 5월 16일에 남아프리카인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버거스는 인근 흑인 부족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남아프리카인 공화국은 흑인들의 맹렬한 공격으로 완패하였으며, 결국 강제로 평화협약에 조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버거스 대통령은 국내 인기를 완전히 잃었으며, 결국에 1877년 4월 12일에는 영국에게 주권을 양도하였다. 1878년과 1879년에 영국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공세를 펼쳤으나 계속 실패하였고, 1879년 11월에 2,000명의 영국 병사들과 보어인들을 동원하고 나서야 이들을 꺾을 수 있었다. 1879년에 일어난 줄루 전쟁은 영국과 줄루 왕국 사이에서 일어난 대격돌이었다. 캐나다 지역에서 카나본 경이 미국 인디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영국 정부는 이같은 전술을 비슷하게 잘 활용하면 줄루족들도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헨리 바틀 경을 보내 줄루족의 공격을 명령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줄루족은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용맹을 떨쳤으나 결국 영국군의 무기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케이프타운에서 쫓겨난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세운 보어 공화국들은 1차 보어전쟁에서는 지역 지형에 기반한 게릴라 전법을 잘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영국군을 막아내었으나, 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이 압도적인 병력과 더 정예병들을 이끌고 돌아오자 결국 엄청난 피해를 내고 영국에 점령당했다. 이때 27,000여 명에 달하는 보어인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영국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어 전쟁이 끝난 이후, 남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던 백인들은 점차 반영국 정책을 펴면서 영국으로부터의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시기에 인종차별은 사회적으로 만연하였으나, 1879년의 원주민 거주법령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부 법령으로까지 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2차 보어전쟁이 끝나고 약 8년 후, 영국 의회는 1909년 5월 31일에 남아프리
출처: 남아프리카 공화국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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