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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Sengoku period
센고쿠 시대(일본어: 戦国時代, 전국시대)는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이다. 1493년의 메이오 정변, 더 이르게는 1467년의 오닌의 난에서 시작한다고 보며, 1573년에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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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일본어: 戦国時代, 전국시대)는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이다. 1493년의 메이오 정변, 더 이르게는 1467년의 오닌의 난에서 시작한다고 보며, 1573년에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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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센고쿠 시대(일본어: 戦国時代, 전국시대)는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이다. 1493년의 메이오 정변, 더 이르게는 1467년의 오닌의 난에서 시작한다고 보며, 1573년에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질 때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
센고쿠 시대(일본어: 戦国時代, 전국시대)는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이다. 1493년의 메이오 정변, 더 이르게는 1467년의 오닌의 난에서 시작한다고 보며, 1573년에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질 때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 혹은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1568년) 이후 오다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쇼쿠호 시대'(織豊時代) 또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불러 구분하기도 한다.
오닌(応仁) ・ 분메이(文明) 난 이후의 어지러운 세상을 당시의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 고노에 히사미치(近衛尚通) 등의 구게가 오닌의 난 이후의 난세를 고대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의 난세에 비유하여 전국 시대(일본어: 戦国の世 센고쿠노요[*])라고 표현한 것이 센고쿠 시대의 어원이다. 이치조 가네요시는 자신의 저서 《초담치요》(樵談治要)에서 '나라의 수호자는 결백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당대의 수호령국제를 가리켜 '현재 여러 나라의 국사들이 임기를 마친 뒤에도 자자손손 봉토를 받아 세를 떨치니 춘추12제후, 전국 칠웅과 같지 않은가'라며 비판하였다. 또한 고노에 히사미치의 일기 《고홋쇼지히사미치기》(後法成寺尚通公記, 近衛尚通公記)의 에이쇼(永正) 5년(1508년) 4월 16일조에 '전국시대처럼(戦国の世の時の如し)'이라고 되어 있다. 「…にことならず」「…の時の如し」라는 직유 표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당시의 구게들이 사용했던 "전국 시대"이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전국 시대를 가리킨다.
다케다 신겐의 《고슈법도차제》(甲州法度次第) 제20조에 「天下戦国の上は、諸事をなげうち武具の用意肝要たるべし」라고 되어 있어, 당시의 무가들도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대를 「전국」이라고 자각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일본 외사》(日本外史)에서도 센고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권11에 "시간이 흘러 전국에 이르러, 군웅은 각각 사병을 거느리고"라고 되어있어 이후의 일본에서도 당대를 가리켜 센고쿠 시대라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문으로 편찬된 《일본외사》에 나오는 「전국」이라는 말의 출현 빈도는 의외로 적다.
에도 시대의 서민들에게 친숙했던 강담(講談)이나 라쿠고(落語) 등에서는 겐키·덴쇼 때(元亀天正の頃)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으며, 일본사의 시대 구분으로 센고쿠 시대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이다.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 존재하고 있었으나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여 화폐의 사용이 늘어나고 상업도시들이 탄생하였으며,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방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특히 15세기 초의 지진과 기아와 같은 자연재해들은 채무와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
경제적 문제에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된다. 이 전쟁에서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이 이끄는 서군은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하였으며, 곧 다른 구니들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확산은 중앙 정부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이 권력의 공백을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이 메웠다. 이 권력 이전 과정 속에서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아래에서 이미 성장을 이룩한 다케다나 이마가와 등과 같이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능력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찬탈당한 다이묘들도 많았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풍조 하에서 능력있는 가신들이 봉건 영주들을 무너뜨리는 하극상(일본어: 下剋上 게코쿠조[*]) 현상은 1493년 호조 소운이 이즈를 탈취한 것에서 시작되어, 센고쿠 시대 동안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종교 교단 역시 이 시기에 다이묘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결집하고 봉기를 유도하여 정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은 무수한 농민 봉기(잇코 잇키)를 이끌었으며 가가에서 성공적으로 다이묘를 제거하여 100여년간 독립을 유지하기도 하였다(가가 잇코 잇키).
1세기에 달한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을 끝내고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하는 게 가까워졌다. 노부나가는 현 아이치현의 일부인 오와리의 이름 없는 영주에서 일본 중부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1582년 부장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죽었다(혼노지의 변). 오다 가의 졸병으로 출발하여 노부나가의 신뢰받는 부장으로 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도요토미는 남은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를 확립했으며, 천한 출신 때문에 쇼군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대신 조정의 최고위직 간파쿠에 취임하여 도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통일은 되었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곧바로 이웃 나라인 조선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조선 측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며 그래서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면서 일본을 염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을 다녀온 이후에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하면서 다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부산진성을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전쟁을 시작했으니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이 없었으나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전쟁을 계속했다. 이는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다시금 정치적 혼란에 접어들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도쿠가와, 우키타, 마에다, 우에스기, 모리의 다섯 장수를 5대로(五大老)로 임명하여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삼았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기 전까지 5대로의 상호 견제 속에서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후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에 불충하다는 탄핵으로 내란이 재개되어, 세키가하라의 전투로 이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승리자가 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지배를 끝내고 스스로 쇼군의 직위에 올라 일본의 마지막 막부가 된 에도 막부를 건설하였다. 에도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되었다. 에도 막부는 전쟁을 싫어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단 한 차례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도호쿠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대대로 토지를 소유해온 내력을 가진 가문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다. 예외로는 와카사 다케다 가문(若狭武田氏)의 후예를 자칭하는 가키자키 가문이 쓰가루 해협 연안의 중소호족을 통일한 것과, 난부 가문(南部氏)으로부터 독립한 쓰가루 가문(津軽氏)을 들 수 있다. 단,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는 예부터 쓰가루 지방(津軽地方)을 소유한 난부 가문에 주살당한 오우라 가문(大浦氏)의 혈육인지 난부 가문의 혈육인지 애매하다.
도호쿠 지방은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동란에 크게 말려들지 않았고, 당연히 그보다 더 먼 중앙에서 벌어진 전쟁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 전란이라고 말해야 15세기 전반에 들어선 뒤, 난부 가문의 센보쿠(仙北), 가즈노(鹿角) 출병과 다테 가문(伊達氏)의 가호쿠(河北) 지방에서의 침공 등의 영지 다툼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나 도호쿠 지방에서도 사사가와 구보(篠川公方)와 시즈쿠이시 어소(雫石御所)가 사라지는 등 완전히 무사평온한 상태는 아니었다. 또한, 1522년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가 오슈 단다이인 오사키 가문(大崎氏)을 축출하고 무쓰 슈고직에 오르는 등 하극상의 기미도 볼 수 있다.
1542년 다테 다네무네, 하루무네(伊達晴宗) 부자간의 다툼이 일어나 다테 가문과 연이 있는 무쓰, 데와 주변의 다이묘들이 말려든 대란으로 발전하였다(덴분의 난). 이 난의 결과로 다테 가문의 결속력이 저하되어 주변의 모가미 가문(最上氏)등 타 세력이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1570년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난부 하루마사, 안도 지카스에, 쓰가루 다메노부 등 도호쿠 지방에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리는 인물이 등장하여 일대 세력을 구축하여, 후의 새로운 중앙정권으로 들어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그대로 영지를 추인받았다(오슈 시오키(奥州仕置)). 일반적으로 안도 가문(安東氏)이 아키타현을, 난부 가문(南部氏)이 이와테현을 중심으로 아오모리현 일부를, 오사키 가문(大崎氏)이 미야기현 중부를, 가사이 가문(葛西氏)이 미야기 현의 이시노마키시로부터 북부를, 모가미 가문(最上氏)이 야마가타현을, 다테 가문(伊達氏)이 미야기 현 남부와 야마가타 현 남부 그리고, 후쿠시마현의 일부를 소유했으며, 아시나 가문(蘆名氏)이 후쿠시마 현을 다스렸다.
간토 지방에서는 교토에서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큰 대란 이 연이어 일어나,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 그리고 그 방계(傍系)인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이 간토의 패권을 두고 삼파전을 펼쳤다.
이 틈을 파고들어 이세 모리토키(후의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이즈의 호리고에 구보를 멸망시키고 간토로 진출. 이 고호조 가문과 야마노우치·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항쟁은 1546년 일어난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고호조 가문이 대승을 거두고, 이후 두 우에스기 가문의 쇠퇴로 막을 내렸다. 1552년 고호조 가문은 고가 어소(古河御所)를 제압하여 고가 구보를 장악하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을 고즈케로 쫓아내었다. 쫓겨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은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후에 우에스기 겐신)을 의지하여 호조 가문과 나가오 가문(長尾氏)이 간토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형세가 되었다.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가 되어 간토 간레이를 승계한 우에스기 겐신은 잠시나마 호조 가문의 거성이었던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지만,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 우에스기 가문과 호조 가문간의 전투는 간토의 호족들을 양분하여, 호조 우지야스와 사토미 요시타카 간의 고노다이 전투(国府台合戦)를 시작으로 양진영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1579년 우에스기 겐신이 죽자 히타치의 사타케 가문(佐竹氏), 아와의 사토미 가문(里見氏) 등이 호조 가문의 공세에 대항해보지만, 호조 가문의 세력 신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오슈의 다테 가문(伊達氏)의 남하해 옴에 따라 사타케 가문은 남북 양면의 공세에 따른 압박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의 패권을 쥐고 다이묘끼리의 전투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자, 호조 우지마사는 이에 맞서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하지만 1590년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 공세 앞에 호조 가문은 결국 무릎을 꿇고 멸망하였다(오다와라 정벌). 1590년 음력 8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되어 에도 성에 입성하였다. 그 후 도요토미 정권에서 에도 막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타케 가문과 사토미 가문등 종래 간토 세력들은 전봉 혹은 가이에키(영지 몰수) 되어 간토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가이국에서는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후예이자 가이 슈고인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가 가이 전토를 통일한 뒤에 그 여세를 몰아 시나노 공격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1541년 중신들이 적자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추대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추방하였다.
신겐 역시 시나노 공략을 진행하여, 스와 가문(諏訪氏), 오가사와라 가문(小笠原氏), 무라카미 가문(村上氏)을 차례차례 물리치고 시나노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 시나노 전역을 장악했다. 예전부터 시나노는 슈고 권력이 약화되어 시나노 중부에 오가사와라 가문, 시나노 북부에 무라카미 가문, 기소 지방의 기소 가문(木曾氏), 스와 지방의 스와 가문, 시나노 동부에 사나다 가문(真田氏)등의 유력 고쿠진이 할거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신겐은 시나노의 여러가문을 각개 격파하여 시나노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 시나노의 호족을 비호하던 에치고의 나가오
출처: 센고쿠 시대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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