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0161
콤모두스
Commodus
콤모두스(Commodus)는 서기 177년부터 192년까지 재위한 제17대 로마 황제이며, 처음에는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명목 상의 공동 황제로 있었고 180년부터는 단독 재위하였다. 콤모두스의 단독 재위 시기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평화의 번영의 황금기인 팍스 로마나의 종결이 시작된 시기라고 보통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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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모두스(Commodus)는 서기 177년부터 192년까지 재위한 제17대 로마 황제이며, 처음에는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명목 상의 공동 황제로 있었고 180년부터는 단독 재위하였다. 콤모두스의 단독 재위 시기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평화의 번영의 황금기인 팍스 로마나의 종결이 시작된 시기라고 보통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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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모두스(Commodus)는 서기 177년부터 192년까지 재위한 제17대 로마 황제이며, 처음에는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명목 상의 공동 황제로 있었고 180년부터는 단독 재위하였다. 콤모두스의 단독 재위 시기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평화의 번영의 황금기인 팍스 로마나의 종결이 시작된 시기라고 보통 여겨진다.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172년 마르코만니 전쟁과 176년 동방 속주 순방 때 동행하였다. 다음 해, 그는 16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황제 및 집정관이 되었다. 그의 단독 재위 기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시절보다는 군사적 분쟁은 적었으나, 내분과 정치 모의가 빈발하며, 콤모두스를 점점 더 독재적인 통치 방식으로 몰아갔다. 이 상황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로 그가 공연을 벌이는 것을 포함하여 그의 신격화된 개인숭배로 정점에 이르렀다. 통치 시기 내내, 콤모두스는 국정을 황궁의 시종 및 근위대장 등에게 맡겼으며, 대표적으로 사오테루스, 페렌니스, 클레안데르 등이 있었다.
콤모두스는 192년에 레슬링 선수 나르키수스에게 암살당하면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막을 내렸다. 그의 뒤를 혼란스러운 다섯 황제의 해의 최초 제위 주장자 페르티낙스가 이었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는 로마 인근 라누비움에서 161년 8월 31일에 태어났다. 그는 재위 중이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아우렐리우스의 친척이자 불과 몇 달 전에 사망한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막내 딸 파우스티나 미노르의 아들이었다. 콤모두스에게는 쌍둥이 형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와 풀푸스 안토니누스가 있었으나 이들은 165년에 사망했다. 166년 10월 12일, 콤모두스는 남동생 마르쿠스 아닌우스 베루스와 함께 부제가 되었다. 남동생이 수술을 받은 뒤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169년에 사망하면서, 콤모두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주치의 갈레누스의 진찰을 받았으며, 갈레누스는 콤모두스의 일상적 질병들을 치료했다. 콤모두스는 인문 교육을 초점으로 하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방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에게 가르침을 준 자에는 오네시크라테스(Onesicrates), 안티스티우스 카펠라(Antistius Capella), 티투스 아이우스 상크투스, 피톨라우스 등이 언급된다.
콤모두스는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인 172년에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의 본영이 있던 카르눈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2년 10월 15일,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승리 칭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칭호는 그의 아버지가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승리를 거둘 때 콤모두스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175년 1월 20일, 콤모두스는 국가사제단에 들어가면서, 공직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175년에 시리아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스스로 황제라 선언하였다.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에서 황제로 받아들여졌던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명백해진 뒤에도 반란을 이어나갔다. 카시우스에 대한 군사 활동을 준비하는 동안, 콤모두스는 175년 7월 7일 다뉴브 전선에서 '토가 비릴리스'를 착용하며, 공식적으로 성년에 도달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본인에 대한 군사 활동이 벌어지기 앞서 자신의 백부장 중 한 명에게 살해당한다.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이후 동방 속주로 장기간의 여정에 동행했고, 이 기간 안티오키아를 방문했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아들은 이후 아테네로 향하였으며, 엘레우시스 밀의종교를 접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176년 가을에 로마로 돌아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이래로 처음으로 적통의 친자를 가진 황제였는데, 아우렐리우스 본인은 양자 황제들이라고도 알려진 이른바 오현제의 다섯 번째 황제로, 이 시기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를 입양했었다.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재위 시절에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관용 표현 '자줏빛 혈통'의 최초 (그리고 337년까지 유일한) 황제이기도 하다.
176년 11월 27일,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는 콤모두스에게 '임페라토르' 칭호를 부여하였다. 현대 저자들은 이 시기를 보통 그의 재위 시작 시점으로 사용하는데, 정확한 사건들의 순서는 불명확하다. 콤모두스는 177년 6월 17일에 '부제로 처음 언급되나, 자신의 통치 시작을 176년에 받은 황제 칭호 선포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다. 예시로 그는 177년 2월경 '호민관'을 맡았지만, 177년 4월에는 이 사건의 시점을 176년 11월로 삼았다.
176년 12월 23일, 두 임페라토르는 함께 개선식을 치렀다. 177년 1월 1일, 콤모두스는 처음으로 집정관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 15살로 당시 기준 최연소 집정관이었다 (집정관직을 위한 최소 연령은 30세경이었음). 그는 이후 178년에 한 차례 더 아버지와 함께 다뉴브강 전선으로 가기 전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와 혼인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3월 17일에 사망하면서, 18세의 콤모두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황제로 즉위하면서, 콤모두스는 로마의 화폐에 대한 평가 절하를 하였다. 그는 데나리우스의 무게를 로마 파운드당 96개에서 로마 파운드당 105개로 주조량을 늘리며 줄였다(3.85g에서 3.35g). 또한 그는 은 함량을 79 퍼센트에서 76 퍼센트로 줄였고, 은의 무게는 2.57 그램에서 2.34 그램으로 줄어들었다. 186년에 그는 은 함량과 무게를 각각 74 퍼센트와 2.22 그램으로 더욱 줄였고, 로마 파운드당 108개가 주조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 데나리우스 평가 절하은 네로의 재위 기간 있었던 로마 제국 최초의 평가 절하 이래 데나리우스에 대한 가장 큰 가치 하락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재위 대부분이 지속적인 전쟁이 있었던 반면, 콤모두스의 통치는 군사적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으나, 정치적 투쟁과 황제 본인의 점점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특징 지어진다. 카시우스 디오의 관점에서], 그의 즉위는 "황금의 왕국에서 철과 먼지의 왕국으로 추락"으로 나타내어 진다.
악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위의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콤모두스의 재위 기간은 충분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현존하는 주요 사료는 헤로디아노스, 카시우스 디오 (콤모두스 시기 동시대 인물이자 이따금 현장 관찰자, 원로원 의원으로, 이 시기에 대해 남긴 그의 기록물은 부분적, 그리고 축약된 형태이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역사서라기보다는 문학 작품의 성격을 띠고 있어 신뢰하기 어렵고, 전기들 속에 허구적 요소가 섞여 있으며 콤모두스의 경우에는, 저자가 비교적 신뢰할 만한 동시대 자료에서 발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것을 다소 과장해 꾸몄을 가능성이 크다) 등이다.
콤모두스는 일시적으로 다뉴브 군단에 남아있다가 다뉴브 지역 부족들과 평화 조약 협상을 맺었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로 돌아간 뒤 180년 10월 22일 전쟁을 종전시킨 것에 대한 개선식을 치렀다. 전임 황제들인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과는 달리, 그는 행정 업무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연이어 등장하는 총애받는 측근들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시작은 니코메디아 출신의 해방 노예로 그의 시종관이 된 사오테로스였다.
국정에 대한 불만은 여러 차례 정치 음모로 이어졌고 쿠데타 시도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마침내 콤모두스가 국정 운영에 나서도록 자극했으며 이때 그는 점차 독재적 방식으로 이를 운영했다. 원로원 계층은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럼에도, 증거 자료에서는 그는 재위 기간의 상당 부분 동안 군대와 평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는데, (그의 주화에도 기록된) 대규모의 풍요로운 볼거리를 베풀었고, 화려한 검투사 경기들을 개최하고 직접 참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활로 동물들을 그는 경기장 위쪽에 서서 활로 짐승들을 죽였다. 그가 동료 검투사들과 싸울 때, 이들은 의도적으로 지고는 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로마 경제는 쇠퇴하였다.
그의 자선 행위와 대규모 오락 행사를 위해 그가 비용을 충당한 방식 중 하나는 원로원 계층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금석문들에서, 국가의 두 명목상 권력인 원로원과 인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전통적 순서가 도발적으로 뒤바뀌어, ‘인민과 원로원(Populus Senatusque…)’으로 바뀌었다.
그의 재위가 시작될 때, 당시 18세였던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원로 고문들 여럿을 물려받았으며 대표적으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콤모두스의 누이 루킬라의 두 번째 남편), 장인어른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티투스 푼다니우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로마시 정무관)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등이 있었다. 그는 또한 네 명이 누이가 있었으며, 이들 모두 남편들이 있었는데 정치적 경쟁자들이었다. 루킬라는 그보다 10살이 많았고 첫 남편인 루키우스 베루스의 미망인으로서 아우구스타 신분을 갖고 있었다.
재위 첫 위기는 182년에 찾아왔으며, 루킬라가 동생을 상대로 정치 음모를 꾸몄다. 동기는 황후 크리스피나에 대한 질투심이었다고 전해진다. 루킬라의 남편 폼페이아누스는 개입하지 않았고 루킬라의 연인이라고 전해지는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167년 집정관이자 루킬라의 친척)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등 두 명이 극장에 들어서는 콤모두스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살해에 실패하고 그의 경호원에 붙잡히고 말았다.
콰드라투스와 퀸티아누스는 처형당했다. 루킬라는 카프리섬으로 추방당했다가 이후 살해당하였다. 폼페이아누스는 정계에서 은퇴를 했다. 두 명으로 이뤄진 친위대 사령관 중 한 명인 푸블리우스 타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도 이때 사실 관여되어 있었으나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그와 그의 동료인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는 증오의 대상이 된 시종 사오테로스의 암살을 꾸몄다.
콤모두스는 사오테로스를 잃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고, 페렌니스는 법률가 살비우스 율리아누스의 아들이자 페타르누스의 딸과 약혼했던 푸블리우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가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두 번째 음모에 파테르누스를 연루시키면서 이제 자신을 부각시킬 기회를 잡았다. 살비우스와 파테르누스는 다수의 저명한 집정관 출신 인물들 및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의 친척이자 장차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직에서 해임당하였다.
권력자 사오테로스가 살해된 뒤, 페렌니스가 정권의 고삐를 붙잡았고 콤모두스는 프리기아 출신의 해방 노예 클레안데르를 새로운 시종장이자 총신으로 삼았는데, 그는 황제의 정부 중 한 명인 데모스트라티아와 혼인했다. 클레안데르는 사실 사오테로스를 살해한 인물이기도 했다. 콤모두스는 자신을 두고 정치적 음모 사건들이 벌어지자 로마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라누비움에 있는 가문의 사유지에서 많이 있었다. 그가 육체적으로 튼튼했기에 그의 주요 취미는 스포츠였으며 승마, 전차 경주, 야수 및 사람과의 격투 등을 하고는 했었다.
콤모두스는 183년에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와 함께 183년에 집정관으로 취임했고 '피우스'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다키아에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알려진 세부 사항은 거의 없으나 미래에 황제 자리를 두고 다투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이 전쟁에서 두각을 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4년 브리타니아에서 총독 울피우스 마르켈루스가 로마의 국경을 안토니누스 방벽이 있는 북쪽으로 다시 한번 전진시켰으나 군단병들이 그의 가혹한 훈련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고 또 다른 군단장 프리스쿠스를 황제로 내세웠다.
프리스쿠스는 군단병들의 추대를 거부하였고, 페렌니스는 브리타니아의 모든 군단장들을 해임시켰다. 184년 10월 15일, 카피톨리누스 제전 당시, 키니코스 학파 출신 철학자 한 명이 콤모두스 앞에서 페렌니스를 대대적으로 비난하였다. 철학자의 이야기는 거짓으로 여겨져 즉시 사형에 처해졌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페렌니스가 무자비한 야심가이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았고 보통 뛰어난 행정가였다고
출처: 콤모두스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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