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뉴욕주
New York
뉴욕주(영어: State of New York, /nuːˈjɔrk/)는 미국 북동부에 자리한 주이다. 중대서양주(the Mid-Atlantic, 中大西洋州)의 하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이며, 대부분이 주의 남동쪽 끝에 자리한 뉴욕과 그 인근에 몰려 있다. 뉴욕주는 뉴저지주·펜실베이니아주와는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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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뉴욕주(영어: State of New York, /nuːˈjɔrk/)는 미국 북동부에 자리한 주이다. 중대서양주(the Mid-Atlantic, 中大西洋州)의 하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이며, 대부분이 주의 남동쪽 끝에 자리한 뉴욕과 그 인근에 몰려 있다. 뉴욕주는 뉴저지주·펜실베이니아주와는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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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주(영어: State of New York, /nuːˈjɔrk/)는 미국 북동부에 자리한 주이다. 중대서양주(the Mid-Atlantic, 中大西洋州)의 하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이며, 대부분이 주의 남동쪽 끝에 자리한 뉴욕과 그 인근에 몰려 있다. 뉴욕주는 뉴저지주·펜실베이니아주와는 남쪽으로, 코네티컷주·매사추세츠주·버몬트주와는 동쪽으로 경계를 이룬다. 또한 롱아일랜드의 동쪽으로는 로드아일랜드주와 해양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캐나다의 퀘벡주·온타리오주와 국경을 이룬다. 뉴욕주는 보통 뉴욕과 구별하기 위하여 뉴욕주(New York State)로 지칭된다.
뉴욕은 뉴욕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 미국의 이주 역사에서 관문 역할을 했고, 재정·문화·교통·제조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이라는 명칭은 네덜란드가 뉴욕을 점령할 시기, 자국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따온 뉴암스테르담으로 이름을 바꿔 훗날 뉴욕이 되었다.
유럽인 정착자들이 오기 전에 뉴욕 지방에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세력 있는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한 인디언 부족은 델라웨어 족, 마히칸 족, 몬타우크 족. 문세 족, 와핑거 족이었다. 다른 인디언 부족은 이로쿼이 어족이었다. 카유가 족, 모호크 족, 오네이다 족, 오논다가 족과 세네카 족이 이로쿼이 어족의 5개 나라를 이루었다. 양 인디언 어족들은 농사를 짓거나 사냥과 낚시를 하면서 살았다. 이로쿼이 어족은 특히 정치와 사회적 조직에서 진보적이었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가 아마 뉴욕 지방을 방문한 첫 유럽인이었을 것이다. 베라자노는 아마도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를 탐험하도록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기용하였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베라자노가 1524년 뉴욕 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강에 도달하였다고 믿고 있다.
1609년 네덜란드인들이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그 강으로 올라갔다. 그는 동방으로 향하는 서북 항로를 찾고 있었다. 허드슨의 항해는 네덜란드에게 현재의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와 코네티컷의 일부를 포함하는 영토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영토는 후에 뉴네덜란드로 명명되었다.
또한 그 해에는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이 퀘벡에서 뉴욕의 북쪽에 들어왔다. 그는 프랑스가 그 땅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려고 방문하였다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이 허드슨의 방문 후의 곧 허드슨강 골짜기에 일부 교역지들과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모피 교역을 시작했다. 1621년 네덜란드인 상인들의 단체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네덜란드 정부는 다음 24년 동안 회사에게 뉴네덜란드에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권리들을 주었다. 1624년 회사는 지방에 정착하기 위해 대략 30 가구의 가족들을 보냈다. 이 가족들의 어떤 사람들은 식민지에서 첫 영구적 정착지 오린지 요새(현재 올버니)를 창설하였다. 나머지는 뉴네덜란드의 다른 부분들에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1625년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의 단체는 맨해튼 섬에 요새를 짓고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를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626년 네덜란드의 총독 페터 미노이트가 맨해튼을 인디언들로부터 60 휠던 혹은 대략 24 달러 어치로 사들였다. 다음 몇 년 동안에 식민주의자들에 의하여 뉴네덜란드에는 빌트비크(현재의 킹스턴), 렌셀라에르스비크(현재의 렌슬레어), 브루켈렌(현재의 브루클린), 셰넥터디와 다른 정착지들이 설립되었다.
1629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뉴네덜란드의 정착지를 서두르기 위해 지주회사를 세웠다. 회사의 사원들은 정착자들과 대지를 식민화하면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대지의 넓은 면적이 주어졌다. 단 하나의 지주회사 만이 170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암스테르담의 다이아몬드 상인 킬라엔 판 렌셀라에르였다. 그의 땅이 현재의 올버니, 컬럼비아와 렌슬레어 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판 렌셀라에르는 자신의 대지를 소작인들에게 임대하기 시작하였다. 뉴욕의 소작인 제도는 184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에서 건너온 영국의 식민자들이 롱아일랜드에 정착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협동을 하였다. 그러나 차차 네덜란드인들에게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추가로 영국의 찰스 2세가 뉴네덜란드를 차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 요크의 공작 제임스에게 영토의 헌장을 주었다. 1664년 영국인들은 뉴네덜란드를 강탈하기 위하여 함대를 보냈다. 군함들은 뉴네덜란드의 항구에 닻을 내려놓자, 페터 스토이베산트 총독은 싸움없이 항복하였다.
후에 영국인들은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가 된 요크의 공작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67년에 체결된 브레다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뉴네덜란드의 모두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인들이 뉴욕의 남쪽을 통치하는 데 승리한 후, 곧 프랑스인들이 북쪽의 거대한 이익을 차지하였다. 프랑스의 탐험가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이 나이아가라 지방에 들어왔다. 1731년 프랑스인들이 챔플레인 호수에 놓인 크라운 포인트에 요새들을 세웠다. 그들은 뉴욕의 북쪽에 영구적 소유지를 차지하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한때 1689년에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곧 뉴욕도 두 나라 사이의 전투 장소가 되었다.
1689년부터 1763년까지 뉴욕 지방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고통을 겪었다. 전투들은 크라운 포인트, 나이아가라 요새와 티콘데로가 요새는 물론 여러 장소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알곤킨 족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영국군은 이로쿼이 족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전쟁은 경계 지역 지방들과 이미 정착된 지역들의 번영을 더디게 하였다. 1763년 양국은 파리 조약을 맺었으나 전쟁은 프랑스의 북아메리카의 모든 소유지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영국인들의 정책들은 뉴욕의 많은 주민들을 화나게 하였다. 그들은 영국군의 주둔, 왕립 재판관들의 권리 혹은 영국 국회에 의하여 통과된 세금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당원이라 불린 다른 뉴욕 주민들은 영국에 반대하지 않았다. 뉴욕 주민들의 어느 정도가 영국당원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과 끝난 후에 3만 명의 주민들이 뉴욕을 떠났다고 한다.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뉴욕은 수많은 전투들의 장소가 되었다. 전쟁 내내 영국군은 뉴욕 시를 점령하였다. 영국당원들은 영국군을 도왔고 이로쿼이 족들에게 애국자들에 대항하도록 설득시켰다. 미국의 애국자들은 1777년 뉴욕의 프리먼스 팜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전투를 이겼다. 이 승리들은 새러토거의 전투에서 영국군이 항복하도록 이끌었으며 전쟁의 역전을 세웠다.
1776년 7월 9일 화이트플레인에서 뉴욕의 지방 의회가 열렸다. 이들은 미국 독립 선언을 찬성하였으며, 또한 독립적인 정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에 뉴욕은 그 첫 헌법을 채택하였다. 조지 클린턴이 주지사에 선출되었으며, 그는 후에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아래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1778년 2월 6일, 뉴욕은 연합 규약을 찬성하였는데, 강력한 연방 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1788년 7월 26일 미국 헌법을 비준하였다. 뉴욕은 합중국에 가입한 11번째 주였다. 뉴욕 시는 1785년부터 1790년까지 미국의 수도로 지내왔으며, 1789년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뉴욕에서 취임식을 올렸다.
주 안의 정착은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1779년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워싱턴 장군은 이로쿼이 족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탐험대를 보냈다. 제임스 클린턴이 지휘하는 군대들은 모호크 계곡을 통하여 인디언들의 마을들을 급습하였다. 군인들은 서스케한나 강으로 전진하여 펜실베이니아주의 티오가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인디언 마을들을 파괴하고, 인디언들의 가축들을 죽이고 그들의 밭들을 불태워버렸다. 이로쿼이 족들의 권력은 영원히 박살나고, 그 대지들은 백인 정착자들에게 문을 열고 말았다. 1810년 뉴욕의 인구는 959,049명이었으며 다른 주들보다 더 많은 주민들이 살았다.
1812년 미영 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전투들이 뉴욕-캐나다 경계에 놓인 국경 지대의 지방들에서 벌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개척자들이 주의 북쪽과 서쪽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정착자들의 수많은 사람들은 뉴욕주의 다른 지역에서 왔으나, 캐나다, 뉴저지,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왔다. 1820년에 들어서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국경 지대들에 살았으며, 뉴욕주의 인구는 1,370,000명 이상이었다.
국경 지대가 열리면서 뉴욕주의 주민들은 해안 지대와 내륙 지역 사이에 더 나은 교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위트 클린턴 주지사는 대서양과 오대호를 잇는 운하의 건설을 오랫동안 주장하였다. 1825년 이리 운하가 완성되었다. 그 운하는 이리호에 버펄로부터 트로이까지, 허드슨강에 올버니까지 뉴욕주를 가로지르고 있다. 운하는 뉴욕 시와 버펄로 사이에 놓인 수로에서 중요한 연결점이었다. 거대하게도 상품을 실어가도록 가격을 낮추었다. 서부의 농부들은 농작물들을 동부로 실어나르기 위해 오대호와 이리 운하의 길을 통하였다. 뉴욕의 번영하는 공장에서 온 제품들을 이리 운하를 통하여 서부로 실어날랐다.
이리 운하의 개통에 이어 주를 가로지르는 철도 개발이 곧 이루어졌다. 운하와 철도는 주의 번영에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또한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 이민자들 수 천 명에게 직업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1850년 뉴욕주는 "엠파이어 스테이트(Empire State, 제국의 주)"란 속칭이 붙었으며, 인구, 제조업과 상업에서 나라를 이끌었다.
부유한 상인들과 위대한 지주들은 식민지 시절 이래부터 뉴욕주를 통제하였다. 19세기 초반에 뉴욕주는 더 많은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였다. 1820년대에 백인들은 투표를 할 수 있는 재산을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1846년에 채택된 새 헌법은 모든 주요 주공무원들이 투표인들에 의하여 선출하도록 요구하였다.
1861년 남북 전쟁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많은 뉴욕주의 주민들이 강한 반노예주의 운동을 펼쳤다. 1863년 뉴욕 시에서 4일 동안 반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북군에 남자들을 징병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반란자들은 불을 내고,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다. 약 500명의 사람들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고, 1.5백만 달러의 재산을 파괴시켰다. 게티스버그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이 결국 폭동을 끝냈다. 징병 거부 폭동에 불구하고, 뉴욕주는 다른 주들보다 더 많은 군인들, 물자와 돈을 북군에 제공하였다.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뉴욕의 여러 지역들에서 새로운 공업이 번영하였다. 중서쪽의 더 많은 제품들이 주의 서부 문길로 알려진 버펄로를 통하여 흘러들었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 늘어나는 상업이 주의 동부 문길로 알려진 뉴욕 시를 통하여 지나왔다. 이미 미국에서 산업과 재정의 수도로 알려진 뉴욕 시는 또한 지도력 있는 문화적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공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고용의 기회에 때문에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등의 남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왔다. 1900년에 들어서 뉴욕주는 7백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1901년 팬아메리칸 박람회가 버펄로에서 열렸다. 이 박람회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통합의 진흥과 이해를 찾았다.
공화당 소속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899년부터 1900년까지 뉴욕주의 지사를 지냈다. 그는 특히 노동의 분야에서 개혁적인 법안을 성원하였다. 1901년에 루스벨트는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이 되었다. 그해 9월 6일 취임식이 열린지 6개월 후에 매킨리가 버펄로에서 박람회에 참석하는 동안에 암살범이 그를 총으로 쏘았다. 매킨리는 8일 후에 사망하고 루스벨트가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뉴욕 시는 유럽에서 돌아오는 수 천 명의 미국 군인들을 맞이한 위대한 항구였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일어난 대공황이 뉴욕을 강타하고 말았다. 실업이 심했으며, 남자들과 여자들은 거리의 모퉁이에서 사과를 팔았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수프 키친이나 블록에 뻗어진 배급 라인에 줄을 섰다.
민주당 소속의 앨프레드 E. 스미스는 두 차례의 뉴욕주지사(1919~20, 1923~28)를 지냈는데,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원 허
출처: 뉴욕주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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