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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Joseon
조선(朝鮮)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하여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 선포로 국호 변경 후 1910년 한일합병까지 존속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한양이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 및 연해주와 국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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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하여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 선포로 국호 변경 후 1910년 한일합병까지 존속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한양이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 및 연해주와 국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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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으로 조사 시작하기조선(朝鮮)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하여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 선포로 국호 변경 후 1910년 한일합병까지 존속하였다.
조선(朝鮮)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하여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 선포로 국호 변경 후 1910년 한일합병까지 존속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한양이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 및 연해주와 국경이 있었다.
조선의 정치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사대부를 근간으로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서 운영되었다. 조선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군주의 지위를 지녔으며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반 관료와 타협하여 정치를 운영하였다. 양반 관료는 초기에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으나 중기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였고 이후 여러 정파로 나뉘어 경쟁하는 붕당 정치를 형성하였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사색당파로 굳어지던 붕당 정치는 성리학의 학풍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예송논쟁이나 호락논쟁과 같은 주제가 정치의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가 등장하면서 붕당 정치 체제는 쇠락하였다.
조선의 군사는 초기 오위 체계로 편성되어 있다가 이후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한 진관제와 이를 보완하는 제승방략을 핵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급작스런 외침에 맞서기 어렵다는 점이 부각되어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오군영의 중앙군을 두고 각도에 속오군을 두어 지방을 방어하는 형태로 변화되었고,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상설화 되면서 의정부를 제치고 실질적인 정치 의결 기구로 변화하였다. 조선군의 병력은 초기 부터 병역을 지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번을 서는 형태로 정착되었으나 양반들의 병역 기피가 극심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양인들도 되도록 군포를 대납하고 병역을 대신하고자 하는 풍조가 일어 조선 후기 이후 실제 병역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양민이나 천인들이 많아 속오군은 천예군이라고 멸시 받을 지경이었다. 이는 조선 말 여러 위기에서 제대로 된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은 지역에 할거하며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농업을 우선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조선의 경제는 화폐보다 현물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상당수의 교환이 상호간의 호의에 의해 선물을 주고받는 호혜경제의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국가의 조세 수취와 분배, 상품의 교환 등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 전기 및 중기의 상업은 금난전권이 주어진 독점적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고 보다 자유로운 상업활동은 금난전권이 폐지된 신해통공 이후에 이루어졌다. 화폐의 원활한 보급은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구리를 수입한 뒤에야 가능하였다. 후기에 들어 민간이 운영하는 수공업이 발달하여 오늘날에도 지역 명산물로 꼽히는 한산모시나, 전주시의 부채와 같은 물품들이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상업망이 발전하면서 이익을 목적으로한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고 조선 후기 등장한 오일장과 같은 정규 시장은 오늘날에도 전통 시장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의 주요 운송 수단은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운이었다. 주요 교통 요지에 조창을 세워 세곡을 보관하였고 조운선을 통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육지의 교통로는 역참을 두어 국가의 주요 연락망으로 삼았고 전국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9 - 10 개의 도로를 운영하였다.
조선의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다.
조선의 문화는 여러 이웃 문화의 수용과 독창적인 발전이 교차되며 형성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전통 문화로 손꼽히는 한옥, 한복, 한식 등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완성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조선은 5백여 년 동안 이어진 국가로 그 사이 세계의 역사는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역시 이 기간 동안 안팎의 변화를 겪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분에서 시기별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 또는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시기에 대한 구분은 아직 학계 전반에서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략적으로 건국 및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15세기 - 16세기 초반 까지를 초기로 보고, 사림의 등장과 붕당 정치가 형성된 16세기 중반 - 17세기를 중기로 보며, 18세기 초 - 19세기의 시점을 후기로 본다.
고려왕조 말엽, 원나라의 세력 약화와 명나라의 건국으로 국제 정치 지형은 크게 변화하였다. 국내에서는 새롭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에 입각한 국가 운영을 주장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는 정몽주와 같이 고려의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는 온건파와 조준, 남은, 정도전과 같이 역성혁명을 불사하고자 하는 급진파가 대립하였다. 이들은 요동반도에 대한 진출을 놓고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놓고 갈등을 빚었고 요동의 정벌을 위해 출진하였던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권력을 잡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신흥무인세력, 신진사대부 급진파는 처음에는 국왕을 교체하고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였으나,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는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국호를 변경하지 않고 잠시동안 고려로 유지했지만, 나중에는 고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명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였다. 국호의 결정은 고조선을 근거로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에서 유래한 화령(和寧)을 후보로 세우고 명나라에서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국호가 조선으로 결정된 것은 기자조선의 사례를 들어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명나라와 단군조선 이래의 독자성을 의식한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절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국왕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형태로 재위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세습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조선의 국가 제도 역시 독자적인 국풍을 유지하였다.
건국 초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의 홍무제가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고 내부에서는 왕자의 난과 같은 분열과 두문불출과 같은 일부 사대부의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을 다독여야 하였다. 조선은 외교에서는 명과의 사대를 강화하고 내부에서는 왕권의 확립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였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영락제의 즉위 이후 사대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대외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민본 사상과 천명을 앞세워 새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였다.
조선의 국서와 외교문서는 국명을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다.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은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이후 사용되었다. 한편 이씨 조선(李氏朝鮮), 또는 이조(李鮮)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사 정리 사업으로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용어를 별다른 비판없이 사용하다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조선은 전제군주적인 국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왕국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관료제로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점차 새로운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고 《경국대전》을 통하여 이를 명문화하였다. 성리학은 유학의 한 갈래로 송나라 시기 형성되어 한국에 전해졌다. 성립 시기 성리학은 양명학, 훈고학 등의 다른 유학 갈래들과 경쟁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성리학만을 참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유학의 다른 유파들은 배격하였다.
성리학이 독점하는 국가 이념의 수립은 이후 조선 내의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파가 형성되는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 학파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었고 학파의 수장으로서 자리잡은 유학자는 비록 현직 관료로 있지 않더라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이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생각하였으나 그들 역시 성리학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편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는 서학이나 동학과 같은 움직임은 사문난적으로 배격되었다.
조선은 5백여 년 동안 이어진 국가로 그 사이 세계의 역사는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역시 이 기간 동안 안팍의 변화를 겪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분에서 시기별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 또는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시기에 대한 구분은 아직 학계 전반에서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략적으로 건국 및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15세기 - 16세기 초반 까지를 초기로 보고, 사림의 등장과 붕당 정치가 형성된 16세기 중반 - 17세기를 중기로 보며, 18세기 초 - 19세기의 시점을 후기로 본다. 이러한 변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시기를 전후 양분하였던 기존의 구분이 지나치게 외적 요인에 의존적이라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반해 초중후의 삼분 방법은 사림의 등장 등 내적 변화를 주요 원인으로 삼고 있다.
조선 초기는 정치적으로는 이성계의 건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의 등장에 따른 각종 사화가 있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성계의 건국은 성리학적 이상에 따른 정치 실현이라는 신진사대부의 요구와 함께 원나라가 북원으로 물러나고 명나라가 수립되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국내 세력의 갈등이 함께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원나라 간섭기가 길어지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왕족과 권문세가 역시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원과 명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고려는 고토회복을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과의 전쟁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가 명실상부한 중국의 패자라는 인식 아래 신흥무인세력과 급진적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초기 새로운 왕조의 정치 질서를 두고 많은 갈등이 벌어졌다. 왕자의 난은 개국공신인 정도전 등과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주장한 이방원의 갈등이 원인으로 결국 이방원이 즉위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 왕권과 신권의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세조 찬위 역시 이러한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
한편, 조선 초기는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시기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한편 전국을 조사하여 《세종실록지리지》를 작성하는 등 여러 개혁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시기 사군과 육진이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어 조선의 영토는 오늘날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와 유사하게 되었다. 조선의 국가 운영을 위한 법전인 《경국대전》은 세조 시기 준비되어 성종 즉위 초 반포되었다. 이후 조선은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의 보완 체제를 추가하였으나 갑오경장에 이르러 폐지될 때까지 《경국대전》을 공식적인 법제로서 유지하였다.
제도의 정비가 일단락 된 성종 시기 조선의 국왕은 안정된 정국의 운영과 함께 강력한 왕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연산군의 폭정은 절제되지 않는 전제군주의 왕권에 대한 반감을 가져왔고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사림파는 재야의 학연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학파와 정치의 연계는 후일 붕당 형성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중종반정 이후 정치를 주도한 사림파는 조광조의 과감한 개혁이 좌절된 후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부침이 반복되었으나 결국 조선의 정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의 정치주도는 반대적으로 왕권의 제약을 의미하였고 조정의 공식적인 회의인 윤대에서 군약신강(君弱臣强)이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군주였기 때문에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다. 함부로 권력을 휘둘렀을 경우 언제든 반정이 일어나 폐위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하게 된 후 사림 내에서는 학파와 인맥에 따라 붕당이 형성되었다. 먼저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 있었고, 다시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의 사색정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사안의 결과에 따라 정국을 주도하기도 하고 밀려나기도 하는 경쟁적 관계였다.
조선 중기의 가
출처: 조선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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