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360
얀 지슈카
Jan Žižka
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체코어: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ˈjan ˈʒɪʃka][*], 1360년? ~ 1424년 10월 11일)는 중세 말기의 체코인 군인, 용병이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지지자로, 후스가 화형당한 뒤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를 이끈 지도자였다. 후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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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Žižka
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체코어: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ˈjan ˈʒɪʃka][*], 1360년? ~ 1424년 10월 11일)는 중세 말기의 체코인 군인, 용병이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지지자로, 후스가 화형당한 뒤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를 이끈 지도자였다. 후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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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체코어: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ˈjan ˈʒɪʃka][*], 1360년? ~ 1424년 10월 11일)는 중세 말기의 체코인 군인, 용병이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지지자로, 후스가 화형당한 뒤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를 이끈 지도자였다. 후스 전쟁 당시 후스파 군대는 세 번의 십자군을 맞아, 지슈카가 살아있을 때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지슈카는 생전에 상승의 무패장군이었고, 현재는 체코의 국민영웅이다.
얀 지슈카는 체히 왕국 트로츠노브(오늘날의 보로바니)에서 최하급 귀족으로 태어났다. 이후 불분명한 이유로 제도권 밖으로 사라져 무법자 생활로 청년기를 보낸 뒤, 용병대장으로서 재등장하여 그룬발트 전투(1410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고용되어 라드진 헤우민스키를 독일기사단으로부터 방어했다.
이후 고향 체히에서 벌어진 종교내전에서 지슈카는 수도메르 전투(1420년), 비트코브 고지 전투(1420년), 쿠트나호라 전투(1421년) 등, 중요한 초전들에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군대를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두 무찌르면서 후스파의 중요한 군사지도자로 부상했다.
지슈카의 전략전술은 당대 기준으로 사파(unorthodox)였으나 혁신적인(innovative) 것이었다. 군대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적절히 훈련시키는 것은 물론, 바겐부르크(무장 사륜마차)에 소구경 캐넌과 화승총병을 싣고 기동방어전을 펼쳤다. 고향 땅에 대한 지리에 통달했고, 군대의 기율을 엄정히 유지했다. 또한 농민들을 속성으로 훈련시켜, 고도로 훈련받고 중무장한 기사단 십자군을 농락했는데, 심지어 일반적으로 십자군 측이 수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프라하 비트코브 고지에는 얀 지슈카와 그의 1420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이 지슈카 기념상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청동기마상이다.
얀 지슈카의 집안은 그 고향 트로츠노브 마을에 둘 뿐인 마이어호프 집안 가운데 하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숲 속의 참나무 한 그루 아래서 태어났는데, 참나무 옆으로 마이어호프 소유의 들판과 연못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슈카의 집안의 가격은 신사 정도에 해당하는 최하급 귀족 제마네(zemané) 였으나, 귀족으로서 다스릴 봉읍은 거의 없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지슈카에게는 동기가 여럿 있었다고 전하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남동생 야로슬라프(Jaroslav)와 여동생 아네슈카(Anežka) 둘 뿐이다. 가문의 문장은 가재였다.
지슈카의 정확한 생년월일도 알려진 것이 없다. 1378일 4월 3일자 서류에 “트로츠노브 사람으로 지슈카라고 불리는 얀”(라틴어: Johannes dictus Zizka de Trocnov)이 결혼계약의 증인으로 등장한다. 이 사료로 보건대 지슈카는 이 즈음에 이미 성인이었다는 것이고, 역산해서 1360년 정도를 생년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 계약서류의 얀 지슈카가 우리가 아는 후스파 장군 얀 지슈카와 동일인인지 직접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다. 체코 역사학자 바츨라프 토메크 등은 얀 지슈카가 1378년에 이미 성인이었으면, 1419년 이후 군사령관으로 활약하기에는 너무 늙게 된다면서, 결혼계약서에 증인을 선 사람은 얀 지슈카 장군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프란티셰크 슈마헬은 얀 지슈카라면 나이 따위가 그 군사적 재능의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라 반박한다. 페트르 코르네이(Petr Čornej) 같은 학자는 “지슈카(Žižka)”라는 이름이 얀 지슈카 일족의 다른 누구에게도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없다면서, 이것은 씨명이 아니라 얀 지슈카에게만 부여된 별명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얀 지슈카의 이름은 1378년에서 1384년 사이에 작성된 이런저런 재산문서들에 나타난다. 이는 지슈카가 오랜 기간 재정적 문제로 곤란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1381년, 지슈카는 트로츠노브의 토지 상속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프라하에 등장해 서류에 이름을 남긴다. 이것을 지슈카가 어려서부터 프라하에서 수학했다는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의 『보헤미아의 역사』 기록과 어떻게 대조할지는 난감한 문제다. 1384년 문서에서는 “지슈카라고도 하는 요한네스”의 아내 “카테리나(Kateřina)”의 존재가 언급된다. 해당 문서는 지슈카가 카테리나의 지참금으로 받은 밭을 팔았다는 내용이다. 이후 지슈카의 이름은 20년 뒤 그가 용병대장이 되어 재출현하기 전까지, 글로 쓰인 사료상에서는 완전히 증발한다.
14세기에서 15세기로 넘어갈 무렵, 체히에서는 인드르지흐 3세 즈 로슘베르카 등의 남부 귀족들이 무능한 국왕 바츨라프 4세에 대한 반란을 여러 차례 일으켰고, 심지어 국왕이 인드르지흐 3세의 포로로 잡혀 일시적으로 유폐되기도 했다. 그러나 얀 지슈카가 이런 난리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15세기 초엽에 얀 지슈카가 가독을 이어받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토지를 조금씩 팔아넘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부 사료에서는 지슈카의 아버지가 왕실 사냥터지기로 일하다 1407년에 죽었다고 시사하는 바, 지슈카 또한 왕실에서 일을 맡아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확증할 만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그런데, 1406년부터 지슈카는 로슘베르카 영지의 『흑색서』(라틴어: acta negra maleficorum)에 도적떼 두목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어쩌다 지슈카가 도적이 되었는지 사연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지슈카가 인드르지흐 3세 및 부데요비체와 그 동맹시들을 공공연히 적대한 것을 보면, 자기 가문에 가해진 어떤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마헬은 남체히 지역에 도적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원인을, 부유한 로슘베르카 가문의 영지(그리고 교회의 영지도)가 계속 늘어간 동시에, 채무와 가난에 시달린 하급귀족들이 영민들을 이끌고 함께 도적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얀 지슈카는 고향 트로츠노보에서 쫓겨나듯 떠나게 된다. 토메크 또한 지슈카가 조그만 봉읍조차 지키지 못하고 쫓겨났을 가능성을 의심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급귀족이 정리당하는 것은 당대에 흔한 일이었다. 그 결과 지슈카는 무법자의 삶을 살게 되었고, 발코운(Valkoun)이라는 지역 귀족의 원조를 부분적으로 받았다.
어쨌든 간에, 이 일대에는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지슈카는 자기 적들을 기회만 되면 해치려고 했다. 이 때 지슈카와 손을 잡은 것이 마테이 부드체라는 도적 두목이었는데, 그는 오로지 금전적 이익만 추구하는 진짜배기 도적이었다. 지슈카의 도적단은 세들로 마을(오늘날의 치메르 근교), 롬니체 나드 루슈니치에서 멀지 않은 방앗간, 흘라바트체의 어느 이름 모를 여인의 집, 또는 그냥 숲 속에서 노숙하는 등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도적들은 체히 남부의 가도를 여행하는 상인들과 행인들을 약탈했다. 도적단의 주요 수입원은 강도짓, 유괴 후 몸값 뜯기, 읍락 공격 등이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자기 생활비를 해결하고, 세작과 아지트의 이용료를 부담했다. 도적단 시절 지슈카는 최소 한 명의 남자를 확실히 살인했는데, 이 피해자는 인드르지흐 3세의 부하였다. 지슈카의 도적단은 인드르지흐 3세의 다른 적들과 접촉을 도모하기도 했다. 예컨대 1408년 지슈카는 프라하티체 근교의 후스성을 공성하는 준비과정에 참여했다(당시 후스 성관백은 미쿨라스 즈 후시인데, 후스 전쟁 때 지슈카의 타보르파 군세에 합류해 선임간부가 된다) 그 밖에도 알레슈 즈 비토바, 에르하르트 즈 쿤슈타트 등의 귀족들이 공성전을 벌이면서 지슈카의 도움을 구했다.
마테이를 비롯해 지슈카의 도적단 멤버들은 상당수가 결국 잡히거나 죽었다. 1409년 바츨라프 4세가 부데요비체시와의 분쟁의 종료에 합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츨라프 4세는 6월 27일 지슈카에게 특별히 편지를 보내 사면을 고했고, 부데요비체시 측에도 지슈카를 사면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적어도 바츨라프 4세가 지슈카를 남체히 분쟁에 있어서 자기 편에 섰던 인물로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폴란드 사람 얀 드우고시가 쓴 연대기에 따르면, 1410년 얀 지슈카는 폴란드-리투아니아-독일기사단 전쟁에 용병으로서 참전했다. 지슈카는 중세 유럽 최대의 단일 회전 중 하나였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측에서 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투는 1410년 7월 15일에 벌어졌고,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연합군이 독일기사단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고, 기사단 총장 울리히 폰 융깅겐을 포함해 독일기사단 지도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후 독일기사단은 과중한 전쟁배상금으로 인해 다시는 예전과 같은 위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드우고시의 기록에 따르면, 지슈카는 전투가 끝난 뒤 라드진 읍락의 수비군으로 근무했다.
얀 지슈카가 1411년부터 1419년까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확실한 것이 없다. 루카슈 프라슈스키(Lukáš Pražský)가 1527년 이후에 작성한 사후 사료에 따르면, 지슈카는 바츨라프 4세의 아내인 조피 왕비의 시종관이 되었고, 조피가 얀 후스의 설교에 참석할 때 동행했다고 한다. 후스가 1413년에 체히 남부로 망명간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내용은 1411년에서 1412년 사이의 일일 것이다. 지슈카와 개인적으로 지인이었던 후스파 역사가 바리네츠 즈 브레조베(Vavřinec z Březové)에 따르면, 1419년경 얀 지슈카는 “보헤미아 왕의 가족”(라틴어: familiaris regis Bohemiae), 즉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16세기에 작성된 연대기들에서도 확인된다. 1414년 폴란드의 독일기사단 재침공(성공하지 못함)에도 지슈카가 종군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이 전쟁이 끝나고 1개월 뒤인 1414년 11월 7일에 프라하의 나 프리코페(Na Příkopě) 거리에 있는 집 한 채를 “외눈의 왕실문지기 야넥”(라틴어: Janek portulanus regius)가 구매했다는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체코 역사학계는 대체로 이 “왕실문지기”를 얀 지슈카와 동일인으로 비정한다. 1416년, “문지기 야넥”은 이 집을 팔고, 구시가지의 좀 더 작은 집을 새로 사 이사한다.
1419년 7월 30일, 얀 졔블리스키가 이끄는 후스파 군중들이 시청 신청사로 몰려가 감옥에 갇힌 후스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지슈카도 이 때 후스파 행렬 가운데 있었다. 요구가 거절되자, 폭도화된 군중들은 시청사에 난입해서 시참사회 의원들을 창밖으로 내던져 죽였다. 이 소위 제1차 프라하 투척사건은 후스 혁명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바츨라프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켜 17일만에 죽고 말았다. 이후 후스파는 프라하를 접수하고, 적대세력들을 모두 추방했다.
1419년 11월 13일, 지기스문트 왕과 프라하 시민들 사이에 일시적인 휴전이 체결되었다. 지슈카는 이 타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라하를 떠나 당대 체히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플젠으로 갔다가, 플젠에서도 다시 떠났다. 1420년 3월 25일, 지슈카는 후스 전쟁 최초의 교전이었던 수도메르 전투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대를 박살냈다. 이후 지슈카는 강경 후스파가 성채를 세우고 웅거하던 타보르로 이동해 타보르파에 합류했다. 타보르파의 교회 조직은 철저한 민주적 기반 위에 엄격한 군대 기율이 적용되는, 다소 청교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슈카는 이 새로운 종교-민주-군사 공동체의 조직화에 큰 역할을 했고, 네 명의 군사지도자(hejtman) 중 한 명이 되었다.
지슈카는 바겐부르크 전술의 발달에 기여했다. 기동요새 바겐부르크는 체코어로는 보조바흐라드바(vozová hradba)라고 불렸다. 수적으로 우월한 적군을 맞아, 후스파 군대는 전투용으로 개조한 수레를 사각형 또는 원형으로 배치했다. 수레의 바퀴와 바퀴를 사슬로 묶었다. 이 수레벽 앞에 참호를 팠다. 수레 한 대당 16-22명의 병사가 탑승했는데, 쇠뇌수 4-8명, 총통수 2명, 장창 또는 편곤으로 무장한 살수 6-8명, 방패수 2명, 운전수 2명이었다.
후스파의 전투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제1단계는 방어전이고, 제2단계는 공세적 반격전이었다. 제1단계에서 후스파는 적군 가까이 수레진을 배치하고, 포격으로 적들을 자극해
출처: 얀 지슈카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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