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1826
교향곡 9번(베토벤)
Symphony No. 9
《교향곡 9번 라단조, 작품 번호 125》는 1824년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 작곡한 아홉 번째 교향곡이자 마지막 교향곡이다.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쓴 작품으로, 이 음악은 노래와 합창을 수반한 교향곡이다.
작품1826
Symphony No. 9
《교향곡 9번 라단조, 작품 번호 125》는 1824년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 작곡한 아홉 번째 교향곡이자 마지막 교향곡이다.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쓴 작품으로, 이 음악은 노래와 합창을 수반한 교향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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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번 라단조, 작품 번호 125》는 1824년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 작곡한 아홉 번째 교향곡이자 마지막 교향곡이다.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쓴 작품으로, 이 음악은 노래와 합창을 수반한 교향곡이다.
베토벤 자신이 부제를 붙이진 않았지만, 통칭하여 《합창》이나 《합창 교향곡》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은 이 작품은, 해가 바뀔 때마다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듣게 되는 행사음악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을 떠나 이 작품은 거인 베토벤이 그의 철학과 음악사상을 최고의 음악으로 표상하려 했던 그의 마지막 걸작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4악장은 독창 및 합창과 함께 연주되고, 가사는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독일어: An die Freude)이 사용되며, 그 주제는 "환희의 송가"(영어: Ode to Joy)로 사랑받고 있다. 원곡의 가사는 독일어이지만, 세계의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그 가사로 노래되는 경우도 있다. 유럽 평의회에서는 유럽 전체를 기리는 공식 상징가(유럽가)로, 유럽 연합(EU)에서는 연합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각 채택하고 있고, 이외에도 코소보 공화국의 잠정 국가 및 옛 로디지아의 국가로 제정되기도 하였다.
베를린 국립 도서관 소장의 자필 악보 자료는 2001년에 국제연합교육과학 문화기구(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초연 및 초판 판각에 사용된 필사 악보가 2003년에 소더비 경매에 올랐을 때에는 3,300,000달러 (약 4251505500원)에 낙찰되었으며, "인류 최고의 예술작품"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원래 교향곡이라 함은, 소나타 형식으로 쓰인 관현악을 위한 악곡으로, 제1악장이 소나타 형식, 제2악장이 완서악장, 제3악장이 미뉴에트, 제4악장이 소나타나 론도라고 하는, 4악장제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베토벤은 교향곡의 제3악장에 스케르초를 도입했고, 교향곡 6번에서는 5악장제 · 의사(擬似)음에 의한 풍경묘사를 시도하거나 했지만, 교향곡 9번에서는 제2악장을 스케르초로 하는 대신 제3악장에 명상적이고 종교적 정신성을 가진 완서악장을 두고, 최후의 제4악장에 네 명의 독창과 혼성 합창을 도입했다. 이러한 이유로 《합창》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독일어권에서는 제목을 붙이지 않고, 단지 《교향곡 9번》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환희의 송가"로 알려진 제4악장의 선율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에서 3분의 1 정도를 발췌, 일부 편집한 후 곡을 붙인 것에 의한 것이다. 교향곡에 성악이 사용된 것은 이 곡이 반드시 처음은 아니었고, 페터 폰 빈터의 《전쟁 교향곡》 등 전례가 있지만, 실제로 효과적으로 사용된 것은 처음이다.
또한, 베토벤 이후에도 성악이 첨부된 교향곡은 계속 희귀한 존재였다. 베를리오즈나 멘델스존, 리스트 등이 교향곡에서 성악을 사용하고 있지만, 성악이 있는 교향곡이 일반화가 된 것은 9~70년 후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이 작곡되었을 무렵부터였다.
대규모 편성이나 한 시간을 넘는 장대한 연주시간, 그간의 교향곡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팀파니 이외의 타악기(심벌즈나 트라이앵글 등)의 사용, 독일 낭만파의 맹아를 연상시키는 명상적이고 장대한 완서악장(제3악장)의 존재, 그리고 독창이나 혼성 합창의 도입 등,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한 그 이전의 교향곡의 상식을 깼다.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 등 후속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베토벤의 파격적인 정신을 이어받은 바그너나 리스트는 교향곡이라는 껍데기 자체를 깨고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이처럼 교향곡 작곡가 이외에게 끼친 영향도 크다.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는 연말이 되면 각지에서 "합창"의 공연이 열린다. 최근에는 단순히 연주를 듣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 합창단의 일원으로 연주에 참여하는 애호가들도 늘고 있다. 오케스트라 외에 독창자와 합창단까지 필요로 하고 있어, 연주의 기회가 반드시 많지는 않지만, 음반의 제작은 종지부와 모던 모두에서 풍부했고, 프랑수아 자비에르 로스가 지휘한 BBC 웨일스 국립 교향악단의 라이브 연주 디스크가 잡지의 덤으로 첨부된 적이 있었다.
베토벤이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에 감동하여 곡을 붙이려고 마음먹은 것은 1792년의 일이다. 베토벤은 당시 22세의 나이였고, 아직 《교향곡 1번》도 작곡하지 않은 시기에 접해 있어, 그가 오랜 기간 이 곡의 구상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는 이 시를 교향곡으로 사용할 예정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곡은 《교향곡 7번》으로부터 3년 정도가 지난 1815년경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어 1817년에 "런던 필하모닉 협회"(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교향곡 작곡을 위촉받은 베토벤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실제로 작곡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지만, 베토벤은 다른 작품에 여러 차례 선율을 사용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7번》, 《교향곡 8번》을 작곡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초에는 두 개의 교향곡을 병행해 작곡할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성악을 포함하지 않은 기악의 것만으로 편성된 교향곡이었으며, 별도로 성악을 도입한 교향곡 "독일 교향곡"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교향곡 두 개를 병행해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두 개의 교향곡의 아이디어를 통합해, 현재와 같은 형국의 교향곡이 되었다. 《환희의 송가》 선율이 만들어진 것은 1822년경의 일이다. 또한 당초 작곡되었던 제4악장의 선율은 나중에 《현악 사중주 15번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의 제5악장으로 유용되었다. 초고는 1824년에 완성되었고, 이로부터 초연시까지 몇 번의 개정을 거치며 1824년 5월 7일에 초연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개정되고 있다. 악보의 초판은 1826년에 이르러 쇼트 사를 통해 간행되었다. 헌정은 당초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승하(昇遐)로 인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프로이센 왕)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교향곡에 독창과 합창을 도입하는 것은 베토벤 뿐만이 아니라 당시 모든 음악가에게 처음이라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베토벤의 전기를 집필한 제자 안톤 쉰틀러는 후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제4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적절히 도입하는 것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이 방에 들어와서는 '해냈어, 드디어 해냈다고!'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고서는 '실러를 대상으로 한 불멸하는 송가를 부르세'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보여줬지요."
그러나 그 착상은 곧장 실현되지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제4악장을 완성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초연은 1824년 5월 7일에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베토벤의 입회 하에 미하엘 움라우프의 지휘로 《장엄미사》의 "키리에", "크레도", "아뉴스 데이"나 서곡 《헌당식》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당시 빈에서는 로시니의 오페라가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토벤은 당초 빈 청중에게는 자신의 음악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베를린에서 초연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베토벤을 지원했던 리히놉스키 백작 등의 주선으로 빈 초연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만들어지자 베토벤은 베를린 초연을 포기했다.
《합창》의 초연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참석자의 증언에 따르면, 《합창》의 초연은 리허설 부족(2회의 전체 리허설 밖에 없었다)에 의해, 상당히 불완전했다는 시사가 있다. 소프라노 솔로의 존탁은 18세, 알토 솔로의 웅거는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가세했고, 남성 솔로 두 명은 초연 직전에 변경되어(바리톤 솔로의 자이페르트가 악보를 받은 것은 초연 3일 전으로 알려짐) 솔로 파트는 상당한 불안감을 안고 초연을 맞고 있었다. 게다가 총 연습 회수가 2회로 적고, 관악기의 엑스트라까지 갖춘 것이 초연 전날이어서 일정상 빠듯했으며, 연주자는 아마추어가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오랜 전쟁으로 프로 연주가는 일손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초연 기획 단계에서도 "빈에는 공연 피아니스트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합주의 탈락이나 붕괴를 막기 위해 피아노가 참가해 합주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성악이 포함된 이 한 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대작 교향곡의 초연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베토벤의 젊었을 때 부터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궁정 고문관 니콜라우스 츠메스칼 폰 도마노베츠 남작은 병 때문에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들것에 실려 이 초연을 들으러 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테아터 차이퉁" 지에 의하면, 대중은 음악의 영웅을 최고의 경의와 동정심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훌륭하고 거대한 작품에 가장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환희에 찬 박수를 보냈으며, 종종 섹션의 끝에서는 몇 번이나 반복했다는 평론가의 기재가 있다. 베토벤은 당시 이미 청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움라우프가 정식 지휘자로, 베토벤은 각 악장의 템포를 지시하는 역할로 지휘대에 올랐다. 베토벤 자신은 초연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연주 후에도 청중을 쳐다볼 수 없었고, 박수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청중의 갈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알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가 베토벤의 손을 잡고 청중을 돌아보게 해 비로소 박수를 볼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관중은 열광했고, 앙코르에서는 두 번이나 제2악장이 연주되었고, 세 번째 앙코르를 하려다 병사들이 말렸다고 한다. 초연으로부터 16일 후인 1824년 5월 23일의 두 번째 공연에서의 반응은 이런저런 이유로 초연 때보다 미미했다.
세계 최초의 음악학교로 설립된 파리음악원 졸업생 프랑수아 앙투안 아브넥은 파리 오페라좌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약하다 지휘자로 전향해 1828년 모교에 파리음악원 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체계화된 음악 교육을 받은 멤버들의 이 파리음악원 관현악단은 "비길 데 없는 관현악단", "유럽 최고 수준의 관현악단"이라는 평판을 얻었는데, 아브넥은 베토벤 신봉자였다. 베토벤 교향곡의 악보를 철저히 분석해 자신이 지휘자로 있는 파리음악원 관현악단 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삼은 것이다.
1831년에 3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아브넥은 처음으로 《합창》을 지휘, 연주했다. 다만 제4악장은 여건상 연주되지 않았고, 제1악장에서 제3악장까지만 연주했다. 이후에도 아브넥은 종종 제4악장을 빼고 《합창》을 연주했다. 이 연주를 듣고 감명깊게 본 두 작곡가 겸 지휘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당시 파리 음악원 학생이었던 엑토르 베를리오즈로, 그는 베토벤을 본받아 작곡에 힘쓰게 된다. 또 한 사람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파리에 와 있던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다. 결국 바그너는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의 속에 독일로 돌아가지만, 아브넥의 베토벤 교향곡의 연주회 기억은 감격으로 남았다. 그리고 언젠가 《합창》의 전 악장을 부활 연주하는 꿈을 꾸었다. 이때부터 《합창》은 여러 작곡가들의 피아노 편곡이 이루어지면서 수수하게 침투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소년 시절부터 베토벤의 작품에 열중해 도서관에서 빌려온 그의 악보를 필사했다. 《합창》도 예외는 아니어서 피아노 편곡까지 했을 정도이다.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그는 고향 독일로 돌아가 1842년에 드레스덴에서 오페라 《리엔치》를 공연, 큰 호평을 받았다. 이 공적으로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당시 작센왕국의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된 그는 염원하던 《합창》의 부활 연주에 착수했다.
드레스덴에서는 매년 부활절 직전인 일요일에 오케스트라의 양로 연금의 기금 적립을 위한 특별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연주회에서는 오라토리오와 교향곡이 연주되는 것이 단골 메뉴였다. 1846년에 바그너는 이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합창》을 다룰 것을 선언했다. 극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는 반대파 설득을 위해 팜플렛과 해설서를 써내 설득에 힘쓰면서 《합창》의 악보에 개정을 가했다.
그는 베토벤의 시대에는 악기가 빌달하지 않았으며, 작곡자는 본의 아니게 머리에 그린 멜로디를 모두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베토벤이 현대의 발달된 악기를 본다면, 이처럼 악보를 가필 개정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관악기 보
출처: 교향곡 9번 (베토벤)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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