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캘리포니아주
California
캘리포니아주(영어: State of California)는 미국의 서부에 있는 주로, 미국의 서부 해안선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주지사는 개빈 뉴섬이다. 인구는 4천만 명에 육박해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이며, 주요 대도시로는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샌디에고가 있고, 주도는 새크라멘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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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fornia
캘리포니아주(영어: State of California)는 미국의 서부에 있는 주로, 미국의 서부 해안선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주지사는 개빈 뉴섬이다. 인구는 4천만 명에 육박해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이며, 주요 대도시로는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샌디에고가 있고, 주도는 새크라멘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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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주(영어: State of California)는 미국의 서부에 있는 주로, 미국의 서부 해안선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주지사는 개빈 뉴섬이다. 인구는 4천만 명에 육박해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이며, 주요 대도시로는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샌디에고가 있고, 주도는 새크라멘토이다. 주는 남북으로 긴 형태로, 최남단의 도시 샌디에고는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오리건주, 동쪽으로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와 접한다. 남쪽으로는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 태평양과 접하며, 환태평양 조산대에 포함되어 매그니튜드 8급의 지진을 경험한 바가 있다.
주의 중앙에는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가, 동쪽은 시에라네바다산맥, 북쪽은 캐스케이드산맥, 남쪽은 테하차피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해안 산맥이 있다. 센트럴 밸리는 캘리포니아의 농업 중심이며, 주 식량 생산의 약 3분의 1을 생산하고 있다. 센트럴 밸리는 새크라멘토-샌 호아킨 삼각주에 의해 2개로 나뉘어 있으며, 북쪽의 새크라멘토 밸리에는 새크라멘토강이 흐르고, 남쪽의 샌 호아킨 밸리는 샌와킨강이 흐르고 있다. 새크라멘토강과 샌 호아킨강을 준설하면서 두 강이 충분한 깊이를 유지하고 있어서 내륙 도시에도 몇 개의 항구가 있다. 이 삼각주는 주의 중요한 수원(水源)이기도 하다. 이 물은 삼각주 지역에서 퍼 올려지며, 센트럴 밸리 프로젝트와 주 수도 프로젝트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운하 웹을 통해 수송된다. 이 물은 주 인구의 2/3에 가까운 2,500만 주민의 식수와 샌 호아킨 밸리 서쪽 지역의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시에라네바다는 미국 본토에서는 최고봉인 휘트니산(해발 4,421m)이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동쪽에는 철새 서식지인 오웬스 발레와 모노 호수가 있고, 서쪽에는 지우기 호수가 있으며,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 경계선에서 타호 호수가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은 겨울에 북극 수준의 기온까지 내려가고, 미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펠리세이드 빙하 등 많은 작은 빙하도 남아 있다.
영화 산업으로 유명한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 옆에 위치하고 있고, 그리고 남쪽의 애너하임에는 디즈니랜드가 있다. 이외에도 유니버셜 스튜디오, 식스 플래그 매직마운틴 등의 놀이공원들이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있다. 캘리포니아는 다른 주에 비해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 인구가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캘리포니아(California)라는 지명은 스페인 출신 탐험가들이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와 알타캘리포니아 지역 (현재의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 텍사스주, 와이오밍주의 일부)에 대해 '라스 칼리포르니아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 이름은 가르시 로드리게즈 데 몬타블로의 스페인 기사 문학 장르의 1510년 작 Las sergas de Esplandián에서 나오는 허구의 칼라피아 여왕 이야기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이야기에서 칼라피아 여왕의 왕국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금과 진주가 넘쳐나는 환상의 섬으로 묘사되며, 이 섬은 황금 갑옷으로 치장한 여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으며, 아마조네스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며 그리핀과 같이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들도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칼라피아 여왕은 무슬림들과 함께 맞서 싸웠고, 그리하여 그녀의 이름은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를 통하여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은 원래 칼리프국을 의미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의 이름을 줄여 CA, Cal., Calif.라는 약자로도 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로 음역한 '가주(加州)'라고도 부른다. 특히,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 캘리포니아를 '남가주',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북부 캘리포니아를 '북가주'라고 줄여 부른다.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캘리포니아 지방의 비옥한 토지에는 약 100,000명에서 300,000명에 달하는 많은 인디언들이 살았다.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여러 종족이 있었으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다. 사막과 높은 산이 캘리포니아 인디언들을 멀리 동부의 종족들로부터 갈라놓았다. 그중 후파 족은 현재 캘리포니아주 남서부에 살았다. 마이두 족은 중부에서 살았고, 케찬 족은 남부에 살았다. 포모 족은 샌프란시스코 북부에 있는 현재 레이크, 멘도시노와 소노마 카운티에 이르는 영토를 영유하였다. 캘리포니아 지방의 다른 인디언들은 미워크 족, 모독 족과 모제이브 족 등이 있었다.
스페인에 의하여 고용된 포르투갈의 탐험가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는 현재 캘리포니아주에 속하는 해안을 본 첫 유럽인이 되었다. 1542년 카브리요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뉴스페인(오늘날의 멕시코)에서 북부로 항해하였다. 카브리요와 그의 부하들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본질적으로 스페인이 취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스페인에서의 무역과 탐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 지역에 대한 탐사를 중지하였고, 그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234년 동안이나 탐사되지 않았고 정착 활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543년에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사망하였다. 어떤 역사가들은 카브리요의 원정이 캘리포니아 해안의 전체를 따라서 오늘날의 오리건 만큼 멀리 북부로 항해한 것으로 생각한다.
카브리요는 캘리포니아의 원주민들에 대해 100~150명에 그치는 혈족 관계의 작은 시골 마을 정도되는 기초적인 생활을 하는 족속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유럽인들이 농사에 대해 설명하여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개를 제외한 어떠한 가축도 기르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 도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도구는 나무, 가죽으로 만든 것과 직물 바구니, 그물, 돌과 사슴 뿔이 전부였다. 몇몇 집은 나무와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또 다른 집들은 땅을 60~90 cm 정도 파들어가 그 위를 동물 가죽과 갈대를 엮거나 진흙으로 덮었다. 사실, 카브리요의 탐사대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개잎갈나무나 세쿼이야로 지어진 반지하 집을 보지 못하고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은 여름에는 무두질한 사슴 가죽이나 다른 동물 가죽으로 만든 최소한의 부분만 가릴 수 있는 간단한 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조잡하게 짜여진 풀로 된 옷을 입었다. 새의 깃털도 옷을 만드는데 이용되었는데, 이는 제사 의식을 위한 옷에만 사용되었다. 샌타바바라와 채널 제도에 살았던 원주민들은 큰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카누를 타고 낚시를 하거나 무역을 하기도 하였는데, 캘리포니아 삼각주와 샌프란시스코 만의 원주민들은 개잎갈나무로 만들어진 카누를 이용하였고, 캘리포니아 북서부 해안의 원주민들은 메타세쿼이야 나무의 속을 파낸 원시적인 형태의 배를 이용하였다.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즐겨 섭취하던, 옥수수와 감자는 캘리포니아의 짧은 3~5개월의 우기와 캘리포니아의 7~9개월에 달하는 건기 (지중해성 기후 참조)에서 관개 없이 재배는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의 풍부한 자연환경과, 수천년 동안 캘리포니아 원주민에 의해 개발된 환경 관리 기술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인구 밀도를 이루어 내었다. 원주민들은 연어와 다른 물고기, 사슴 ,도토리, 소나무 견과류, 연체 동물, 열매, 곤충, 식용 식물 등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이는 유럽식 농경 없이도 수렵과 채집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캘리포니아 대부분의 원주민의 주식은 도토리였는데 원주민들은 이 도토리를 건조시키고, 껍질을 벗기고, 밀가루로 갈아서, 물에 담그고 탄닌을 침출하고 요리하여 먹었다. 수세기 동안 사용된 큰 바위에 도토리를 연삭하던 구멍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도토리 가루는 보통 영양가 있는 버섯과 함께 조리되어 원주민들이 즐겨 먹었다. 도토리 연삭은 거의 항상 여성에 의해 수행된 노동 집약적인 과정이었다. 원주민 가족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참나무 숲을 보호하고 도토리를 채취하였다. 도토리는 가을에 대규모로 채집되어 겨울을 나는데 유용한 양식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원주민 언어는 80~90개 언어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부는 위기에 처해 있지만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캘리포니아 동쪽의 그레이트베이슨 사막 뒤에 위치한 높고 험준한 시에라네바다산맥, 북쪽의 광대한 숲과 산, 남쪽의 험준한 소노라 사막과 서쪽의 태평양은 아메리카 대륙의 나머지 지역 주민들과의 무역과 교류로부터 캘리포니아를 고립시켰으며, 스페인인, 골드러시, 그리고 유럽의 식민지 정착민 도착의 비극과 피해를 늦추었다.
1565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한 금과 은으로 중국과 다른 아시아 지역의 상품과 향신료로 거래하는 교역로를 개척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핀에 거점을 세웠고, 멕시코와의 무역은 마닐라 갤리온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향하는 갤리언은 처음에는 북쪽으로 향해 북위 40도로 가고 그 다음에는 키를 동쪽으로 돌려 서쪽에 있는 무역풍과 해류를 이용하여 빠르게 멕시코로 도달할 수 있었다. 이 갤리언 선단은 태평양을 가로지른 후, 북위 40도에서 멘도시노 곶 근처로부터 바람과 캘리포니아 해류를 활용하여 캘리포니아 해안 남부로 가서 남쪽으로 약 2,400 km 항해를 하면 멕시코의 모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만은 1769년 탐사를 통해 발견될 때까지 2세기 동안 발견을 피할 수 있었다.
1579년 잉글랜드의 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자신의 세계일주 도중 캘리포니아 해안을 지나가게 된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마을을 약탈하고 태평양 연안의 식민지들을 따라가며 스페인 선박들도 약탈한다. 스페인인들이 그러고 나서 해안을 따라 몇몇의 탐험대를 보냈는데 이는 자신들이 캘리포니아를 잉글랜드에게 잃을 위협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1602년 세바시티안 비스카이노가 이 원정대들 중 하나를 이끌었다. 그는 해안선을 따라 가며 많은 곳들의 이름을 지고 스페인 국왕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보고서에서 비스카이노는 스페인이 캘리포니아를 식민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697년 초에 스페인인들은 오늘날 캘리포니아주의 남부에 있는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에 선교자와 다른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의 총독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는 1769년 샌디에이고에 첫 군사 요새를 설립하는 원정대를 지도하였다. 그는 또한 1770년 몬테리에 하나의 요새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776년 스페인 정착자들의 한 무리가 현재의 샌프란시스코에 속하는 곳에 도착하였다. 정착자들은 요새와 교회를 만들었다. 후에 스페인에 의하여 보내진 또 다른 정착자들은 해안 근처에 마을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캘리포니아 지방에 강한 욕구를 가지지 않았다. 그에 반해, 러시아는 알래스카에서 모피 교역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태평양 해안을 따라 더 멀리 남부로 모피를 탐색하기를 원하였다. 1812년 러시아인들은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에 로스 요새를 건설하였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러시아인의 활동은 1823년에 선언된 먼로 독트린의 한 이유가 되었다. 먼로 독트린에서 미국은 남북아메리카가 유럽의 식민지화에서 벗어나고 유럽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1824년 러시아는 정착지들을 알래스카로 축소 및 이전하는 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사실 러시아인들은 1840년대 초반까지 캘리포니아를 떠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정착지에서 중요한 활약을 하였다. 1769년 포르톨라의 원정 기간 동안에 후니페로 세라가 첫 캘리포니아 선교소를 설립하였다. 이 선교소는 현재 샌디에이고에 설립된 산디에고 데 알칼라의 전신이다. 1823년이 되자 프란체스코회는 21개 선교소들을 지었다. 선교소들 근처에 살던 인디언들은 수도사들을 위하여 농사를 짓고, 천을 짜고 다른 임무들을 하는 데 강요되었고 새로운 병에 노출되었다. 많은 이들은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의 많은 주민들은 선교소들이 없어지기를 원하였다. 1830년대 초반에 정부는 개인적 시민들에게 선교지를 주기 시작하였다. 1846년이 되자 모든 선교소의 재산이 대부분 양도되어 왔다. 이 시기의 동안에 정부는 개인적 지주자들에게 많은 큰 소유지를 주거나 팔았다. 어떤 개인적 지주자들은 가죽과 수지를 위하여 소를 사육하면서 부유해졌다.
캘리포니아는 1822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후에 멕시코의 주가 되었다. 알타 칼리포르니아주와 바하칼리포르니아주는 자신들만의 입법부를 세우고 군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1825년초 멕시코는 캘리포니아에 여러 총독들을 보냈다. 많은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1831년 총독이 된 마누엘 빅토리아는 강압적인 통치를 펼쳐 특히 캘
출처: 캘리포니아주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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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주 촬영 작품 스타트렉: 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