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대영제국
British Empire
대영제국(大英帝國, 영어: British Empire)은 영국 본국과 자치령, 식민지, 보호령, 위임통치령, 그리고 속령으로 구성된 정치 체제였다. 대영제국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잉글랜드 왕국이 건립한 해외 영토와 무역 거점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대영제국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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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Empire
대영제국(大英帝國, 영어: British Empire)은 영국 본국과 자치령, 식민지, 보호령, 위임통치령, 그리고 속령으로 구성된 정치 체제였다. 대영제국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잉글랜드 왕국이 건립한 해외 영토와 무역 거점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대영제국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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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大英帝國, 영어: British Empire)은 영국 본국과 자치령, 식민지, 보호령, 위임통치령, 그리고 속령으로 구성된 정치 체제였다. 대영제국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잉글랜드 왕국이 건립한 해외 영토와 무역 거점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대영제국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고 가장 앞선 세계 강국이었다. 1913년 기준으로 대영제국은 4억 1천2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는 1913년 당시 전체 인구의 23%를 차지했다. 대영 제국은 1920년 355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보유했는데, 이는 전체 지구 면적의 24%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영국의 정치 체제, 법 체계, 언어, 문화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대영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영국이 보유한 식민지 중 한 곳은 낮이었기 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대항해시대이던 15세기와 16세기 포르투갈 제국과 스페인 제국은 유럽인들의 세계 항해를 개척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쌓은 부에 대한 질투심으로,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무역 거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17세기와 18세기 잉글랜드 왕국은 네덜란드 및 프랑스와 일련의 전쟁을 벌인 끝에 북아메리카에서 확고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가 무굴 제국이 지배하던 벵골을 점령한 뒤 인도 아대륙에서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으로 대영제국은 가장 인구가 많았던 식민지이자 가장 오랫동안 보유했던 식민지를 1783년 북아메리카에서 잃게 되었다. 영국은 영국령 북아메리카(현 캐나다)와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 및 영국의 속령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는 한편,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에서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영국은 19세기 전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그들이 보유한 제국의 영토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무역 조차지를, 동남아시아에서 속령을 얻어냈다. 이 시기에 그레이트 게임과 아프리카 분할도 발생했다. 영국이 전 세계에서 패권을 행사하면서 1815년부터 1914년까지 비교적 평화가 찾아왔고, 이 평화를 팍스 브리태니카로 불렀다. 영국은 전 세계에 확보한 식민지 외에도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각 국가의 경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부터 일부 백인 식민지에서는 자치가 허용되었고, 일부 백인 식민지는 1920년대 자치령이 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은 중동에서도 세력을 확장했다. 이 시기 영국의 경제에 독일과 미국이 도전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독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경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자국의 식민지에 크게 의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영제국의 영토는 최대에 이르렀으나, 경제 패권은 미국에게로 넘어갔으며 영국은 더 이상 산업 및 군사 분야에서 최강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동남아시아 및 동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는 일본 제국이 점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만이 누리던 특권이 피해를 입고 영국 경제가 타격을 받음에 따라 대영제국도 쇠퇴하였다.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년 독립했으며, 이후 탈식민지화 운동에 따라 영국은 세계에 보유한 대부분의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는 영국이 강대국 반열에서 밀려났음을 입증하였고 1997년 7월 1일 영국의 홍콩 반환은 대영제국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은 해외에 14개의 속령 및 해외 영토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옛 영국 식민지들은 독립 이후 영연방에 가입했다. 영연방 회원국 중 14개의 국가가 영국과 같은 왕을 모시는 영연방 왕국을 구성하고 있으며, 현재 영연방 왕국의 왕은 찰스 3세다.
대영제국 최대 면적은 3500만 km2에 이르렀으며 이는 달의 전체 면적(3793만 km2)과 비슷하다.
대영 제국의 역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가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으로 합쳐지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96년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신대륙 탐험에 성공한 것을 보고 존 캐벗에게 북대서양을 거쳐 아시아까지 이르는 항해 길을 발견할 것을 주문하였다. 캐벗은 1497년에 캐나다 연안에서 성공적으로 육지를 발견하여 상륙하였지만(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그 역시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착각하였으며, 콜럼버스보다 5년 늦게 도착하였음),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캐벗은 다음해에 다시 아메리카 탐험에 나섰지만, 그 이후 그의 원정대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가 시작된 16세기 후반까지 10년간 국외로 나아가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영국 성공회를 신봉하는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봉하는 스페인은 경쟁 상대가 되었다. 영서전쟁에서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같이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재가받은 사략선들은 아메리카에 주둔한 스페인 항구들을 약탈하면서 챙긴 보물들을 싣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는 일에 종사하였다. 동시에 리처드 해클루트, 존 디와 같은 영향력 있는 저술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조국 잉글랜드 역시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이때까지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연안과 브라질에서 중국까지 일련의 교역소들을 정착시켰고, 프랑스는 나중에 뉴프랑스가 되는 지역에 있는 세인트로렌스강으로 이주민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16세기의 잉글랜드는 비록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지는 못했으나 아일랜드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였다.
하지만 척박한 아일랜드땅에 이주하는 사람의 수는 적었고 북아일랜드 지역에만 꽤나 이주자가 있었다.
1578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험프리 길버트에게 바다 건너 새로운 땅의 발견과 답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해, 길버트는 해적질에 종사하며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수립할 취지로 서인도 제도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악천후 탓에 원정이 초반부터 실패하고 말았다. 1583년에 그는 뉴펀들랜드섬을 언급하면서 아직 아무 이민자들도 없는 이때에 잉글랜드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다시 한번 항해 도전에 착수하였다. 길버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던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붓형제 월터 롤리가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권을 받았으며, 같은 해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 연안에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1604년에 런던 조약을 맺으면서 스페인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였다. 주된 적대국과 평화관계를 맺은 이때, 잉글랜드는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를 공격해 약탈하는 행동에서 스스로 국외에 식민지들을 건설하는 일에 나서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비록 처음엔 계획성 없이 일을 시작했지만, 17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대영 제국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작은 섬들에 자국민들을 이주시키는 사업과 더불어 개인 회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와의 교역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카리브 제도는 최초 몇 번의 식민지화의 실패 이후 성공한 잉글랜드의 가장 중요하고 풍부한 하나였다. 1604년에 기니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주요 이유인 금을 채취하지 못하여 2년만에 실패하였다. 세인트루시아(1605)와 그레나다(1609)의 식민지들은 급격히 실패 하였으나, 세인트키츠섬(1624), 바베이도스(1627) 그리고 네비스섬(1628)으로의 정착은 성공하였다. 이들 식민지들은 곧 포르투갈령 브라질이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실행했던 설탕 플랜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이러한 무역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잉글랜드 의회는 1651년에 잉글랜드의 배만 잉글랜드의 식민지를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의회의 결정은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초래하였고 몇 차례에 걸친 영국-네덜란드 전쟁 끝에 결국 잉글랜드의 아메리카 식민지 독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655년에 잉글랜드는 스페인에게서 자메이카를 합병하게 되며, 이후 1666년에는 바하마 제도를 성공적으로 식민지화한다.
잉글랜드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영구정착한 곳은 존 스미스 선장이 이끌고 버지니아 회사가 지원하여 1607년에 건설한 제임스타운이다. 버뮤다는 1609년에 버지니아 회사 난파선의 깃발로 인해 1609년에 영유권이 주장 되었고 정착민들이 이주하였다. 이 후 식민지들의 대한 버지니아 회사의 특권은 1624년에 폐지되었고 버지니아 식민지의 이름으로 잉글랜드 군주의 직접 통제를 받게 되었다. 또한, 1610년에 런던 앤 브리스톨 회사가 뉴펀들랜드를 식민지화 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 하였다. 1620년도에는 플리머스 식민지가 청교도들을 위한 정착지로 건설 되었다. 종교재판은 많은 영국인들이 위험한 아메리카로의 항해를 결정하는 중요한 동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 1634년에 건설된 메릴랜드 식민지는 로마 카톨릭신자들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로드아일랜드 식민지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건설되었다.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1663년에 건설되었다. 1664년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포트 암스페르담(뉴 암스페르담)이 잉글랜드에 합병되었으며, 이 후 뉴욕으로 도시의 이름이 변경되었다. 뉴욕의 합병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끝맺는 협상 중 수리남과의 교환으로 이루어졌다. 1681년도에는 펜실베이니아 식민지가 윌리엄 펜에 의해 건설 되었다. 비록 미주 식민지들은 카리브 해의 식민지 보다 재정적으로 적은 이익을 제공하였으나 좋은 질의 농작지와 적정한 기후 덕분에 많은 많은 영국 이민자들이 선호하였다.
1670년에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왕립 특권을 사용하여 루퍼트 랜드의 모피 무역의 독점 특권을 허드슨 베이 회사에게 승인하였다. 허드슨 베이 회사가 건설 하였던 요새들과 무역지점들은 때때로 뉴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한 프랑스인들에게 공격을 받곤 하였다.
그 후 2년 뒤에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가 카리브해 영국령 식민지들의 노동력을 충원 하기 위해서 찰스 2세에게 노예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받았다. 노예제는 서인도제도의 대영 제국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807년도에 노예 무역이 금지될 때까지 영국은 3백 5십만명의 노예들을 대서양에서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이는 총 강제 이주된 흑인 노예들의 3분의 1의 양이다. 이러한 노예 무역을 충원하기 위해서 대영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제임스섬(James Island), 아크라(Accra) 그리고 분스섬(Bunce Island)와 같은 요새들을 세우곤 하였다. 영국령 서인도제도에 아프리카 흑인종의 비율은 1650년도에 25%에서 1780년도에는 거의 80%까지 육박하였다. 13개 식민지 주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10%에서 40%까지 아프리카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주로 13개 식민지들 중 남쪽에 주로 정착하였다. 하지만, 열악한 배의 환경과 불규칙적인 식사 제공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건너오는 흑인 노예들 중 7명 중에 1명만이 살아남았을 때도 존재했다.
16세기 말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무역 독점을 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아성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조인트-스토크(joint-stock) 회사들은 재정을 위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후일의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각각 1600년과 1602년에 설치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이들 회사의 첫 번째 목적은 향신료 무역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었고, 그들은 중요한 무역 상대인 인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향신료의 원산지를 차지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두 회사의 상선이 각각 런던과 암스테르담에 근접하게 되면 서로 격렬하게 대항하였는데 특히 네덜란드가 몰루카 (이전의 포르투갈의 성채)를 장악하고, 잉글랜드는 공장을 설립한 1613년에 인
출처: 대영제국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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