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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소련의 붕괴(러시아어: распад СССР)는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142-Н 선언에 따라 공식적으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선언문은 모든 소련의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수립을 허용하는 안이었다. 그 전날인 1991년 12월 25일엔 소련의 대통령이자 소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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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붕괴(러시아어: распад СССР)는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142-Н 선언에 따라 공식적으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선언문은 모든 소련의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수립을 허용하는 안이었다. 그 전날인 1991년 12월 25일엔 소련의 대통령이자 소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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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붕괴(러시아어: распад СССР)는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142-Н 선언에 따라 공식적으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선언문은 모든 소련의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 수립을 허용하는 안이었다. 그 전날인 1991년 12월 25일엔 소련의 대통령이자 소련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발사 시스템을 포함한 전권을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승계했다. 이날 저녁 7시 32분, 모스크바 크렘린에 마지막으로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혁명 이전에 사용된 러시아의 국기가 게양되었다.
그보다 전인 1991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는 러시아를 포함한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연방에 탈퇴하거나 소련 수립 조약에 탈퇴했다. 연방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기 일주일 전, 소련의 11개 공화국은 소련 해체에 합의하고 CIS 수립을 선언한 알마아타 조약에 서명했다. 1989년 혁명과 소련의 붕괴는 냉전 종식의 신호탄이었다.
전 소비에트 국가들 중 몇몇은 독립국가연합, 유라시아 경제 공동체, 러시아 벨라루스 연맹국, 유라시아 관세동맹, 유라시아 경제 연합 등을 통해 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반면에 발트 3국과 핀란드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며 서구권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1985년 3월 11일, 73세의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이 사망한 지 3시간 후 열린 소련 공산당 정치국 선거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54세의 고르바초프는 당시 정치국 위원 중 제일 젊은 사람이었다. 서기장으로써 고르바초프의 첫 목표는 소련의 경제의 부흥이었으며, 그는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우선 경제 및 정치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개혁은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싫어하는 브레즈네프 시기 관리들의 인사 개혁부터 시작했다. 1985년 4월 23일엔 고르바초프의 스승이었던 예고르 리가초프와 니콜라이 리즈코프를 정치국원으로 보냈다. 또한, KGB 의장이었던 빅토르 체브리코프를 후보국원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시키고 국방장관이었던 세르게이 소콜로프를 후보국원으로 선출시켜 강한 '권력'을 가진 관료부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개방은 소련 내 민족주의 운동 및 민족분규를 조장했다. 또한, 1989년 혁명으로 루마니아를 제외한 소련 영향권 하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국가들에 공산주의 정권이 축출되면서, 고르바초프에게도 소련 내 각 공화국들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치권 그리고 자유를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고르바초프 지도 하에 1989년 소련 공산당은 새롭게 수립한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선거에 일부 제한된 간접 선거를 실시한다. 하지만, 1991년까진 공산당 외 다른 정당은 금지되어 있었다.
1985년 5월, 고르바초프는 레닌그라드에서 개혁을 지지하고 수많은 알코올 의존증들에 대한 금주 캠패인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알코올 소비 억제를 위해 보드카, 와인, 맥주의 가격을 인상하고 주류 배급제를 실시했다. 보통 부족한 물품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실시하는 일반적 배급제와는 달리, 주류 배급제는 초기부터 주류 소비를 줄이기 위한 목표로 판매 제한을 위해 실시했다. 이 외에도 고르바초프는 금주 정책 홍보, 공공장소의 음주에 대한 벌금형 재정, 옛 영화의 음주 장면에 대한 검열 등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전시 노력을 위해 알코올 의존증자를 감소하기 위해 시행한 니콜라이 2세의 정책을 본딴 것이었다. 그러나, 시행 초기 정책들엔 고르바초프 프로그램의 목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곡물 절약에 치우처져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결국 이 정책으로 니콜라이 2세 차르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주류 소비가 감소하자 국가 예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는 연간 세금 징수액이 약 1천억 루블이나 감소하였다고 말했다. 또한, 주류 소비도 집에서 자체적으로 기른 감자를 이용한 "욕조 보드카"라는 밀조주가 나타나고 암시장이 성행했다. 또한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러시아인들이 아세톤, 메탄올, 향수 등과 같이 건강에 해로운 알코올 대체제를 마시고 중독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소련의 보건의료 분야 지출에도 심각한 부담을 안겼다. 이 개혁은 시장사회주의 경향이 있던 후기 개혁과는 달리 계획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개혁 조치였다.
1985년 7월 1일엔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정치국원이 되었으며, 그 다음날엔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해임하고 셰바르드나제가 소련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로미코는 28년간 외무장관으로 지내면서 서방에게 거부 씨(Mr. Nyet)로 비판을 받은 바 있었다. 그로미코는 상징적인 직위인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으로 쫓겨났으며 "구체제 사상가"로 지목당했다. 7월 1일에는 그리고리 로마노프를 정치국원에서 축출시켜 경쟁자를 제거했고, 보리스 옐친과 레브 자이코프를 사무국원으로 선출했다.
1985년 가을 내내 고르바초프는 젊고 개혁적인 인물을 정부 내로 들여왔다. 9월 27일, 각료평의회 주석(총리)에 73세의 니콜라이 티호노프 대신 니콜라이 리즈코프가 취임했고 10월 14일엔 국가계획위원회장에 니콜라이 바이바코프 대신 니콜라이 탈리신이 취임했다. 10월 15일 치러진 중앙위원회 회의에선 티호노프가 정치국원에 물러나고 탈리신이 후보국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2월 23일엔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에 빅토르 그리신 대신 옐친을 임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지속적으로 개혁 개방 정책을 밀고나갔다. 1986년 12월 23일, 소련 내 반체제 인사 중 가장 거물이었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고르바초프와 통화 대담을 한 후 7년간의 국내 망명 생활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당시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가장 높은 7등급을 부여받았다. 이 사고로 인해, 사고 시설 주변 30km는 접근이 일부 제한되었고, 누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벨라루스-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 부근은 이용이 불가능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련의 원자력에 대한 큰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복구 비용으로 3억 2700만 달러로 추산되는 등 재정에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1944년 소련에 강제로 병합된 발트 국가들은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정부가 중앙정부의 통제에 저항하는 법률을 수립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독립을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중앙유럽의 소련 통제는 많이 풀어주었으나 발트 해 지역의 분리독립은 용납할 수 없고 필요한 경우 금수조치와 무력 사용을 통해 진압할 것이라 말했다. 또한 정치국에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렸으나, 이러한 공산정권 붕괴가 소련에게까지 이저지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CTAG(라트비아어: Cilvēktiesību aizstāvības grupa, 인권수호연대) 헬싱키-86은 1986년 7월 라트비아의 항구 도시 리예파야의 노동자 리나르츠 그란틴슈, 라이몬츠 비테니엑스, 마르틴슈 바리스 3명이 모여 설립됐다. 단체의 이름은 헬싱키 협정 인권 선언문을 따 지어졌다. 헬싱키-86은 소련 내 최초의 공개적 반공주의 단체였으며, 처음으로 소련에게 반대하는 소수민족 친독립파 운동 단체였다.
1986년 12월 26일, 록 콘서트가 끝난 이른 아침 라트비아 노동자 300명이 리가 대성당 광장에 모여 레닌 에비뉴를 향해 행진하며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러시아는 물러나라! 자유 라트비아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보안군과 시위대 사이 충돌이 일어났고 경찰차 수 대가 뒤집혔다.
1986년 12월,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가 고르바초프의 압박으로 카자흐인인 딘무함마드 쿠나예프가 러시아 SFSR 소속의 제나디 콜빈으로 바뀐 것에 반발해 카자흐 SSR 알마아타에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1986년 12월 17일 아침, 브레즈네프 광장 앞에서 학생 2-300명이 모여 제1서기 쿠나예프의 해임과 러시아인으로 바뀐 것에 대해 항의했다. 나중에 다른 학생들이 시위 군중에 합류하며 1,000-5,000명까지 늘어났다.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내무군, 드루지니키(자원군), 사관후보생, 경찰관, KGB 병력들을 광장으로 모여 시위대를 압박하고 녹화하라 명령했다. 그날 오후 5시엔 군대가 시위대를 해산시키란 명령을 내리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날 밤 알마티엔 보안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다음 날인 12월 18일엔 시위대와 보안군, 자원군, 민병대 간 충돌로 소요사태로 바뀌었고 카자흐스탄 학생들은 대규모로 대치했다. 셋째 날이 되어서야 충돌이 잠잠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알마아타 사건의 소식이 다른 곳으로 퍼지면서 심켄트, 파블로다르, 카라간다, 탈디코르간에도 소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카자흐 SSR 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이 소요로 대략 3,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부에선 수감자 5천명을 포함해 3만-4만명이 체포되었으며, 사상자는 추측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젤토크산 봉기 지도자는 이 시위에 카자흐인 6만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카자흐 SSR 정부는 이 소요사태로 자원군 경찰과 학생을 포함해 2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머리에 큰 충격으로 외상을 입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약 100여명이 구금되었고 몇몇은 노동수용소(굴라크)로 끌려갔다. 미국 의회도서관을 인용한 소식통에서는 최소 2백명이 사망하거나 사건 이후 즉결처형 당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일부에선 약 천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작가 무흐타르 사하노프는 KGB에게 168명이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으나 이에 대해선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1987년 1월 28일부터 30일까지 있었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사회 전역에 걸쳐 데모크라티자치야(민주주의화)라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향후 공산당 선거는 비밀투표를 통해 비당원을 포함한 다수의 후보들 중 한명을 뽑아 선출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CPSU 총회 대표안에선 고르바초프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공산당 내에서 민주주의 이행에 대해선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의 확대에도 주안점을 두면서 언론 매체에 제한 없는 공개 토론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소련 인텔리 계층은 그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실제로 시행할 때까지 약 1년이나 미루었다. 이 때 처음으로 공산당 지도자가 중앙위원회 국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바라는 민중의 지지를 말하며 호소했다. 이 전술은 성공적이었으며, 결국 2년도 못되어 당내 '보수주의자'의 개혁 반대는 막히게 되었으며 정치 개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안은 결국 의도치 않게 개혁할 그 시스템 자체를 죽여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87년 2월 16일, 1950년대 흐루쇼프 해빙기 이후 처음으로 정치범 수십명이 사면되었다. 5월 6일에는 러시아 민족주의 단체 팜야트가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위를 열었다. 정부는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길을 터주어 시위대가 행진하여 당시 모스크바 공산당 총수이자 고르바초프와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보리스 옐친과 즉석 회담을 열었다. 7월 25일엔 크림 타타르족 300여명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모여 1944년 크림 타타르족의 강제 이주에 대해 항의하고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시위를 수시간동안 벌였다. 경찰과 군은 이 시위를 지켜보기만 했다.
1987년 9월 10일, 모스크바에 강경파 정치국원 예고르 리가쇼프가 금지되었던 시위 2개를 허용시키는 내용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발언을 한 후, 보리스 옐친은 흑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고르바초프에게 사임 서한을 보냈다. 고르바초프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정치국원을 자발적으로 사임하겠다 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10월 27일 예정된 중앙위원회 본회의에서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사임서에 써져 있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개혁의 속도가 너무
출처: 소련의 붕괴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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